근엄한 모자 /이기홍
오늘 예식장에 그를 데려가기로 합니다
그는 내 가슴속에 살면서도
맨 위에 올라가 군림하기를 좋아합니다
어쩌면 그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끔, 내 든든한 밑바탕이 되어주는 그가
차갑고 근엄한 얼굴을 치켜들면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가
다소곳이 머리를 조아립니다
예식장에 초대받아 온 사람들도
나보다는 그에게
더 깊은 관심을 표하기도 해 속이 몹시 상합니다
이제 그가 없으면 나는
사람들의 괄호 밖으로 밀려날지 모릅니다
그래서 난 외려 그의 보디가드가 됐습니다
그의 뾰족한 코가 땅바닥에 곤두박질치진 않을까
낯선 바람에라도 끌려가 낭패를 당하지 않을까
조금도 맘놓지 못하고 그를 지켜봐야 합니다
슬그머니 내 위까지 올라와 상전이 된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나 나는 이렇게
나와 다르게 살아야 하나요
그를 몰아내고 청바지 입기를 좋아하는
나를 데려올 수는 없나요
세계일보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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