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786

없는 존재 / 변선우

없는 존재 -변선우 그는 옥상에 서서전봇대에 매달려서내 마음에 들어앉아서 나를 본다 그래서 나는속수무책이 된다 그는 부리가 있고깃털과 날개가 있고갈퀴가 있다 그래서 나는은폐할 수가 없다 어느 날 새벽그가 나를 불렀다휘파람이었다 돌아보니 작은 불꽃이 날아다니고있었다 보라색이었다 아주 선명한 불꽃은 흩어지더니더 더 작게 흩어지더니사라져버렸다 그래서 나는눈을 비벼댔다 불꽃이 사라진 자리로 가허공을 휘저었다그러나 내 것 아닌 것 같은 팔 공간을 싸고 도는얼음 냄새타고 있는 우연의 냄새 그래서 나는웃어버렸다 여름 같은 표정으로쪼개지듯이손뼉도 쳤다 손이 가루가 되어아니 소소한 깃털처럼흩날리기 시작했다 온몸이 흩어져 갔다배반처럼그의 미소가 느껴졌다

희끗, / 김근

희끗, -김근 1 희끗, 당신이 사라진다 길 저편으로 희끗희끗이 희끗 하나만 남기고 희끗 하나만 가지고 남겨진 보이는 희끗에 나는 희끗, 집착하고 당신은 그만 안 보이고 나는 보이기만 희끗, 희끗, 보이다 말다하던 나는 말다는 아주 버려버리고 보이다만으로 내내 보이기만희끗, 2 희끗, 걸어서 올라갔지 그 비탈길 희끗, 희끗, 희끗, 모퉁이진 그비탈길 달빛 무성하고 길섶 너머 숲속 무성하고 깜깜하고 무성하고희끗, 깨지는 듯 물소리 희끗, 희끗, 끗, 끗, 또렷한데 어둠 저쪽에서부터 희끗, 팔랑거리는 나비인지 희끗, 희끗, 뒤집혀 희번덕거리는눈빛인지 희끗, 희끗, 희끗, 지금은 안 보이는 당신의 옷자락인지가, 희끗, 희, 희끗, 희끗, 오는데, 희끗, 걸어서, 희끗, 올라갔다는, 희끗, 말은, 생,..

유령 연주가 / 김재근

유령 연주가 -김재근  자정이 지나고 숲이 흐느꼈다 노래하는검은 잎과죽은 새의 깃털꼬리 잘린 도마뱀과아카시아 새하얀 입술을 위해 내일이 영영 오지 않으니밤은 눈이 멀고눈먼 밤을 끌어안고 영생을 노래해야지 숲을 깨우는 바람의 손짓펄럭이는무덤을 열고검은 밤의 옷을 입고 묘지를 걸어야 해 피어나는 밤의 푸른 안개묘비에 내리는 달빛 얼룩누구의 마지막 호흡인지누구의 기침 소리인지 알 수 없지만 누가 먼저 울어야 하나누가 먼저 떠나야 하나자신의 무덤에 누워자신의 눈알이 짓무르는 소리 듣는다 남은 자는 누구일까누가 알아볼까 귀뚜라미는 귀를 잃고 날개를 부빈다흩날리는 밤의 음표들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는들리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누구도 두 번 죽을 수 없지누구도 두 번 울어야 하지만 산자처럼 두근대는 심장으로 밤은..

나를 멀리 던지기 / 서윤후

나를 멀리 던지기 -서윤후  나의 개 프랑코와 원반던지기를 한다선크림 백탄 도시의 원주민들은 약속이 많아 공원을 그냥 지나친다생략되는 풍경 속에 있다는 기쁨이 온다 너무 멀리 던졌는지 프랑코는 돌아오지 않고부메랑 하나가 날아와 내게로 꽂힌다삼십 년 전 어린 내가 유원지에서 던진 것이 저 멀리 프랑코가 주인을 만나 떠나간다 부메랑은 내게 말을 건다이제 제가 던질 차례예요 동해 맹방해수욕장에서허정 산부인과에서호주 원주민 아보리진이 점거한 언덕에서내가 쏟아져 내린다 나는 나를 가장 많이 잃어버린 사람 부메랑이 꼭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가자전쟁 중의 길 찾기란서로의 참호 속에서 잘 깎인 과일을 먹고오리지널 시리즈를 보고사랑하고 씻은 듯이 헤어지는 일의 반환점 마지막에 프랑코를 부르지 않은 건세상에 나보다..

테러범 / 이예진

테러범 -이예진    캔 콜라를 흔들어봐  언제든 폭탄을 던질 수 있다   몸속에 설탕이 돈다 트럭이 눈길을 달린다 이중에면허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지  훔친 적도 없고  죽인 적도 없다   망가진 것은 많은데   구멍 난 몸에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모르겠어 검은옷만 입는 네가 까만 마음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까 너는 여러 겁의 옷을 껴입었다  심장에 적어둔 말을 보여주기 싫어서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렸는데   몸에 난 구멍으로 찬바람이 들어온다  후진을 할 줄 몰라서  손으로 밀었다   몸에는 설탕이 얼마나 녹아 있을까  구멍을 막아도 춥다 나무 뒤에서 오줌을 눴지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작은 벌레들이 모여든다  우리는 그만큼 작지 않아서  그림자를 만들 수 있지   밀면 밀리는 것 같아 뒤로 걸어가도..

이 시는 간접광고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리호

이 시는 간접광고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리호    부채표 후시딘을 목 주위에 발랐다 날도 더운데 까스 활명수를 바를 수는 없다 영하 1도에도 기운 펑펑   샘표 조림간장으로 두부조림을 만들었다 샘솟는 기운으로월요일   팽귄표 고등어조림은 우체통에 넣어두고 메모장을 남긴다  -내가 느린 게 아니야, 든든한 바다를 빠른 등기로 보내겠어   곰표 밀가루로 눈사람의 손에 장갑을 그리고  수요일은 심심해 곰 같은 애인이라도 불러야지   오뚜기표 튀김가루에 순후추를 뿌리고 핫도그를 만들 때일곱 번째 시험을 치르고 온 녀석의 입   백설표 올리고당을 넣어 맛탕을 할 때는 최대한 나폴거리는 앞치마 공주라고 한 번만 불러줘 전우!   해표 식용유를 물처럼 꿀꺽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겠지   청정원표 구운 소금을 뿌려 미..

소리, 수상한 것들 / 리호

소리, 수상한 것들 -리호  태극기 흔드는 소리 촛불 켜는 소리 버스 종점 눈 쌓이는 소리어젯밤 꿈이 수상하다 측백나무가 앓는 소리 윤달 먹은 가을이 숨는 소리 애동지가꾸물거리며 오는 소리 계절이 뒤바뀌는 소리 예지몽이 잠꼬대하는 소리 보름 지나 하늘이 달 깎는 소리 잘못 걸려 온 전화에서 나오는 헛기침 소리가 수상하다 알람 소리 오십견 어깨 삐걱거리는 소리 마우스 놀라는 소리가위눌리는 소리 돋보기가 다가오는 소리 뒤쫓는 소리 하이힐 소리 철 대문 여는 소리 밥 짓는 소리 배고픈 국수 소리 열 맞춰 계단 오르는 달동네 소리 수십 번의 응찰 끝에 처음으로 성공한 낙찰자는 명도 된 달을 손에 꼭 쥐고 아홉수를 넘겼다 달이 우는 소리로 불로소득을 챙긴 시간 경매사가 수상하다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오기를, 날개..

전면적으로 / 김미령

전면적으로 -김미령 어느 날 공사용 가림막이 전면에 펼쳐졌습니다말수가 줄었습니다당신의 아침 정원으로 기분 좋게 걸어 들어가는 내 모습을 당분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꽃병을 마주 보고 끝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근력을 키우기에 좋습니다과일 접시의 오와 열그 샛길은산책하기에 좋습니다 어느 날 포장지를 뜯어낸 새로운 애인이 우뚝 서 있고 새로운 기분에 적응하기까지미간이 무럭무럭 넓어집니다넓어진 이마로 지나치기 좋은 거리입니다 다른 종류의 웃음은 가끔 무섭습니다 가림막 한쪽 끝에는 구름다리가 걸려 있고파스텔 톤의 저쪽 사람들이손짓합니다자고 나면 새로운 비밀이공터의 야채들처럼 쑥쑥 자라나고 이쪽과 저쪽의 경계엔 시간이 얼마나 빨리 흐르는지 우리가 안고 쓰러졌던 그 자리 주위로쇼핑백을 들고 수없이 지나쳤습니다뭔..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 김이듬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김이듬  해 질 녘 남쪽 해변에 닿았다길은 헤맸지만 도착했다 맨발로 갯벌 밟으며 바다 가까이로 걸어갔다파도에 온종일 들떠 있다가물이 빠지자 바닥에 내려앉은 부표 옆에서 나는 노을을 기다렸고 너는 고둥 잡자며 주머니에서 비닐봉지를 꺼냈다 고둥이 맞아?여기 많다고동이 맞는 말이야? 밀려나가면 밀물이야? 썰물이야? 바지 걷어 올리며 큰소리로내게 묻는 건지자신에게 묻는 건지 정작 물어보니까헷갈리잖아 어두워 가는 갯벌 위엔 경이럽게도 금이 많다금을 따라가면 고둥이 있다 길인지흔적인지자취인지성과나 업적으로 파생되기도 하지 뻘 위에 못으로 그린 추상화 같은이것은생존 발각될 단서순식간에 체취될 노선 고둥이 금을 그으며 기어가고 있다퇴적물 위에 너는 해수 같은 혼합물과 갯벌 같은 잔여물을 사랑하고..

사슴뿔을 줍다(외 1편) / 이창하

사슴뿔을 줍다(외 1편) -이창하  늙은 아버지의 지게가 생각나는 오후지푸라기로 이어진 낡은 인연이 색이 바래지도록 땀을 흘리고 있다오랫동안 이어진 나그넷길에서 너를 만난 것은등이 굽고 백색인 아버지의 머리카락 같은 넝쿨 사이에서멈춘 시간 속을 배회하다 일어난 일이었다 얼마나 흘려야 눈물이 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까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시냇물 위에는 여전히 흰 구름이 흘러가고나는 오래된 외짝의 설화 같은 너를 주워 든다 너는 아버지의 굽은 지게 형상으로 오래된 기억을 지키고 있었으니모든 시작과 끝은 이렇듯 우연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아는지단순하게 맺어진 인연으로아버지의 눈물 같은 형체가 그리워지는세상의 근원을 더듬게 하는 오래된 기억을 주워 들게 한다   그리움의 뿌리  새가 그림자를 훌쩍 떨어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