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2888

라면을 끓이다 / 이재무

라면을 끓이다 -이재무 늦은 밤 투덜대는, 집요한 허기를 달래기 위해신경 가파른 아내의 눈치를 피해주방에 간다 입 다문 사기 그릇들그러나 놈들의 침묵을 믿어서는 안 된다 자극보다 반응이 휠씬 더 큰 놈들이다물을 끓인다 비정규직 노동자처럼 실업을사는 날이 더 많은 헌 냄비는 자부가 가득한표정이다 물 끓는 소리가 요란하다한여름밤의 개구리 소리 같다모든 고요 속에는 저렇듯 호들갑스런 소음이숨어 있다 어제 들른 숲 속 직립의 시간을 사는침묵 수행의 나무들도 기실은 제 안에저도 모르는 소리를 감추고 있을 것이다찬장에서 라면 한 봉지를 꺼낸다라면의 표정은 딱딱하고 각이 져 있다그들이 짠 스크럼의 대오는 아주 견고하고단단해 보인다 그러나 끓는 물 속에서 그들은 금세 표정을 바꿔각자 따로 놀며 흐물흐물 녹아 내릴 것..

꽃의 속도 / 성영희

꽃의 속도 -성영희 불의 속도가 빠르다모닥불에서 옮겨간 검은 발화를 본다한 번 터지면 세상모르고 부푸는 꽃그보다 빠르고 붉은 꽃은 없어서 사람들은 가끔 놀이의 불꽃들을 쏘아 올리기도 한다허공에서 발화하는 불꽃은 허공에서 사라지지만땅에서 옮겨간 불씨는 걷잡을 수 없는 땅의 화염이 된다첩첩산중도 빌딩 숲도거대한 잿더미로 만들고 마는 엄청난 식욕 속에는보이지 않는 하찮은 방심이 있을 뿐이다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번지는 불길에는파멸의 소리음이 외마디로 솟구쳐 오르기도 한다 가랑잎처럼 바스락거리거나잘 마른 장작처럼 토막 난 것도 아닌데그 어떤 걸음보다 빠르게 번지는 방심활활 타오르는 저것은 놓쳐버린 순간이다보이지 않는 검은 속내에는번지는 앞을 맹렬하게 쫓아가는 뒤가 있다반드시 앞을 막아서지 않으면 막을 수 없는 ..

비탈에 기대다 / 박설희

비탈에 기대다(외 1편) -박설희 최루탄 난무하는 교정, 굶주린 배한 치 앞도 안 보이던 스물한 살몸은 뜨거웠으나 세상을 떠나고 싶었던 마음지리산 종주길에 나섰다 그래도 나눌 수 있는 게 있어 다행이라고말라가는 풀에, 갓 피어나는 꽃에, 시든 나무뿌리에핏방울을 뚝 뚝 흘리며 걸었다빈혈을 앓는 내 삶에수혈하듯이 연하천 벽소령 장터목·····몇 송이 꽃 피웠을까풀 한두 포기 튼실히 뿌리내렸을까 천지만물이 동기간물보다 진한 피를 나누었으니잘 견디고 살아남자는 약속 안개 속에서 길을 잃으며, 잃기를 원하며어둠 속에서 네발로 기며길과 길 아닌 걸 구별하며 피를 나누었다,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보였을 때촉수를 뻗어보듯이피의 길을 늘여갔다 길은 계속 비탈이었고비탈이어서, 비틀거리고 넘어지려는나를 받아주었다이..

움직이지 않고 달아나기 멈추지 않고 그 자리에 있기 / 임유영

움직이지 않고 달아나기 멈추지 않고 그 자리에 있기 -임유영 시험이 끝나고 너와 같이 걸었다옛날처럼 손잡고 다정하게여기서 만날 줄은 정말 몰랐네 그렇지개구리 군복을 입은 넌 중앙도서관에서 내려왔고나는 종로 어디 구석진 찻집에서대추차랑 약과를 먹고 있었는데통유리창 밖에서 네가손 번쩍 들고 인사했지우리 그때 눈이 마주쳐서 웃었지네 코에 걸쳐진 잠자리 안경 밑에(넌 가끔 안경을 껶지)하얀색 마스크 속에(너도 요즘 마스크를 쓰고 있겠지)너의 입술이 천천히 산책을 했지 아무래도쫓기는 마음으로이제 곧 경찰이 들이닥치고나의 친구들은 모두 맞아서 다칠 텐데하지만 내가 대오를 벗어나는 선택을 한번 해본 것인데경멸 없이 너를 만나보고대추차도 먹어보고허름한 찻집에도 들어가보고불친절한 주인 남자에게 화내지도 않고담배 피우지..

카테고리 없음 2025.05.16

불행한 일 / 박소란

불행한 일 -박소란 불행을 응원한다 불행의 편에서더 더 더 불행해져라 입술을 잘끈 깨물면서,하마터면 진짜로 그럴 뻔한다 무너진 빌딩 뒤집힌 자동차 우연처럼 불탄 사람들우연처럼타다 만 사람들, 아침이면불행은 어쩔 줄 몰라하며 구형 TV 앞에 엉거주춤 서서폴리스라인이 함부로 뒤엉킨 뉴스를 보는데 그 침울하고 핏기 없는 얼굴은 도무지 남 같지가 않고 간밤 나는 병들어 뒤척이는 한 사람 곁에 누워가늘고 불규칙한 숨소리를 오래 들었다소리가 거의 완전히 잦아들 때까지 그만, 이제 그만,기도하는 블행의 뒷모습을 몰래 지켜보았다집 안에는 언제나 냉기가 감돌고불행은 불행답게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웃고 싶지 않아읽다 만 책이 수북한 책상에 엎드려 대체로 혼자 지내지만때가 되면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출근을 한다 일을 ..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 이기철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이기철 잎 넓은 저녁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웃들이 더 따뜻해져야 한다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 우체부처럼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놓아야 한다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을 쳐다보고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 같은 약속을 한다 이슬 속으로 어둠이 걸어 들어갈 때하루는 또 한번의 작별이 된다 꽃송이가 뚝뚝 떨어지며 완성하는 이별그런 이별은 숭고하다 사람들의 이별도 저러할 때하루는 들판처럼 부유하고한 해는 강물처럼 넉넉하다 내가 읽은 책은 모두 아름다웠다내가 만난 사람도 모두 아름다웠다나는 낙화만큼 희고 깨끗한 발로하루를 건너가고 싶다 떨어져서도 향기로운 꽃잎의 말로내 아는 사람에게상추잎 같은 편지를 쓰고 싶다

작약과 공터 / 허연

작약과 공터 -허연 진저리가 날만큼벌어진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 작약은 피었다 갈빗집 뒤편 숨은 공터죽은 참새 사체 옆 나는살아서 작약을 본다 어떨 때 보면, 작약은목매 자살한 여자이거나불가능한 목적지를 바라보는슬픈 태도 같다. 아이의 허기만큼이나 빠르게 왔다 사라지는 계절 작약은울먹거림. 알아듣기 힘들지만 정확한 말 살아서 작약을 보고 있다작약에는 잔인 속의 고요가 있고고요를 알아채는 게 나의 재능이라서 책임을 진다 공터 밖으로 전해지면 너무나 평범해져 버리는 고요 때문에 작약과 나는가지고 있던 것들을 여기 내려놓았다 작약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슬프고 수줍어서 한층 더 작약이었다.

사과는 사과를 / 주향숙

사과는 사과를(외 1편) -주향숙 꿈같은 거 꾸지 말고 당신한테 가지 말고그냥 살까 하다가도여자는 아이를 낳고 사과는 사과를 낳고누는 누를 낳고 아이를 낳는 동안 구름은 흩어졌고 여자는첨탑 위의 시계처럼 늙어가네 눈을 감았다 뜨면사과밭의 사과는 익어가고 전선 위참새는 떨고 노래를 잊은 기타 줄은 흔들리고노래는 의자에서 미끄러지고 사과가 익어가는 마을에는은하수가 내리고 사랑 같은 거 하지 말고 당신한테 가지 말고그냥 살까 하다가도나는 나를 낳고 누는 누를 낳고 연필의 태도 연필 깎는 자세는 꼿꼿하죠햇살 좋은 창가에 앉아 연필을 깎아요사각사각 햇살을 깎다 보면마음이 생기고 마음을 깎다 보면 빙긋웃음이 나고 연필 깎는 자세는나무밥이 켜켜이 쌓이는 경험이죠 거꾸로 매달리는 철봉처럼왔다 갓다왔다 갔다 음악..

죽변항 / 안도현

죽변항 -안도현 뱃머리에 눈이 쌓이고아프지 않은데 병들었고슬프지 않은데 울었고삿대질도 없이 멱살을 잡았어요 뱃머리에 쌓이는 눈이 보이지 않는 골목 끝에서라면에다 차가운 소주를 삼켜도 다 듣지요뱃머리끼리 부딪칠 때 갈매기 우는 소리 나는 거 당신은 눈 내리는 포구를 보고 싶다고 말했죠산통처럼 눈이 내려요편견처럼 눈이 내려요바다에 그물을 내리듯이그물 속으로 도루묵 떼가 몰려오듯이눈이 내리쳐요 보이나요 북방의 흰 빗금들이 뱃머리에 눈이 쌓이고눈송이는 지상의 빈자리를 꿰매고우리는 목덜미로 눈을 받으며노란 노끈으로 구멍 난 그물을 꿰매요점퍼 옷깃 안쪽으로 수북하게 쌓인 눈을 털어내며 하늘의 어깨에 근육이 붙었나 하고 생각해요갈매기들 깃털이 긴장하고 있어요바로 어제 포구에 새로 도착한 놈들이죠말라붙은 생선 비늘을..

발이 하는 말 / 김욱진

발이 하는 말 -김욱진 아, 어디쯤일까길을 걷다 폐휴지 한 리어카 싣고언덕길 오르는 맨발을 보았다, 나는들었다, 발이 하는 말을발가락은 바짝 오므리고 뒤꿈치는 쳐들고그래도 뒤로 밀려 내려가거든헛발질하듯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혓바닥 죽 빼물고 땅바닥 내려다봐써레질하는 소처럼발바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바닥과 바닥은 통하는 법이야그래, 맞아둘이 하나된 바닥은 바닥 아닌 바닥이지손바닥처럼 그냥 가닿는 대로가닿은 그곳이 바닥이니까여기, 지금, 나는바닥 아닌 바닥에서보이지 않는 발바닥을 보았고바닥 없는 바닥아슬아슬 가닿은 발바닥이 내쉬고 들이쉬는 숨소리 들었다비 오듯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 사이로리어카 바퀴가 미끄러져 내려갈 적마다발바닥은 시험에 들었다땀 한 방울 닿았을 뿐인데그 바닥은 난생처음 가닿은 바닥발가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