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819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 이기철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이기철 잎 넓은 저녁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웃들이 더 따뜻해져야 한다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 우체부처럼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놓아야 한다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을 쳐다보고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 같은 약속을 한다 이슬 속으로 어둠이 걸어 들어갈 때하루는 또 한번의 작별이 된다 꽃송이가 뚝뚝 떨어지며 완성하는 이별그런 이별은 숭고하다 사람들의 이별도 저러할 때하루는 들판처럼 부유하고한 해는 강물처럼 넉넉하다 내가 읽은 책은 모두 아름다웠다내가 만난 사람도 모두 아름다웠다나는 낙화만큼 희고 깨끗한 발로하루를 건너가고 싶다 떨어져서도 향기로운 꽃잎의 말로내 아는 사람에게상추잎 같은 편지를 쓰고 싶다

사과는 사과를 / 주향숙

사과는 사과를(외 1편) -주향숙 꿈같은 거 꾸지 말고 당신한테 가지 말고그냥 살까 하다가도여자는 아이를 낳고 사과는 사과를 낳고누는 누를 낳고 아이를 낳는 동안 구름은 흩어졌고 여자는첨탑 위의 시계처럼 늙어가네 눈을 감았다 뜨면사과밭의 사과는 익어가고 전선 위참새는 떨고 노래를 잊은 기타 줄은 흔들리고노래는 의자에서 미끄러지고 사과가 익어가는 마을에는은하수가 내리고 사랑 같은 거 하지 말고 당신한테 가지 말고그냥 살까 하다가도나는 나를 낳고 누는 누를 낳고 연필의 태도 연필 깎는 자세는 꼿꼿하죠햇살 좋은 창가에 앉아 연필을 깎아요사각사각 햇살을 깎다 보면마음이 생기고 마음을 깎다 보면 빙긋웃음이 나고 연필 깎는 자세는나무밥이 켜켜이 쌓이는 경험이죠 거꾸로 매달리는 철봉처럼왔다 갓다왔다 갔다 음악..

발이 하는 말 / 김욱진

발이 하는 말 -김욱진 아, 어디쯤일까길을 걷다 폐휴지 한 리어카 싣고언덕길 오르는 맨발을 보았다, 나는들었다, 발이 하는 말을발가락은 바짝 오므리고 뒤꿈치는 쳐들고그래도 뒤로 밀려 내려가거든헛발질하듯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혓바닥 죽 빼물고 땅바닥 내려다봐써레질하는 소처럼발바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바닥과 바닥은 통하는 법이야그래, 맞아둘이 하나된 바닥은 바닥 아닌 바닥이지손바닥처럼 그냥 가닿는 대로가닿은 그곳이 바닥이니까여기, 지금, 나는바닥 아닌 바닥에서보이지 않는 발바닥을 보았고바닥 없는 바닥아슬아슬 가닿은 발바닥이 내쉬고 들이쉬는 숨소리 들었다비 오듯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 사이로리어카 바퀴가 미끄러져 내려갈 적마다발바닥은 시험에 들었다땀 한 방울 닿았을 뿐인데그 바닥은 난생처음 가닿은 바닥발가락..

젠가게임*/ 고영민

젠가게임* -고영민 쌓여 있는 시집에서한 권 시집을 조심조심 빼내기레바논 감정 읽기다 읽고 맨 위에 올려놓기아무렇지도 않게 밑돌 빼서 윗돌 고이기야생 사과를꿈속에서 우는 사람 빼내기중얼거리는 사람 빼내기비버리힐스의 포로노 배우와 유령들 빼내기나는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잘 못하고한밤의 이마에 얹히는 손 빼내기거울 속의 천사단검을낫이라는 칼 빼내기들춰보지 않은 시집들은 나날이 쌓이고먼지가 뽀얗게 앉고기러기 빼내기아, 입 없는 것들 빼내기눈부신 꽝을음악집과 초록의 어두운 부분 빼내기나는 나의 방식으로 수다스럽고두 편으로 나누어 혼자 즐기는이 게임은 아슬아슬 좀처럼 끝나지 않고치킨이 배달되고, 콜라는 서비스붉은 표지의 흰 당나귀들의 도시로 돌아가고쌓인 시집들이 한꺼번에우르르 무너질 때까지검은 눈, 자작나무 ..

발이 하는 말 / 김욱진

발이 하는 말 -김욱진 아, 어디쯤일까길을 걷다 폐휴지 한 리어카 싣고언덕길 오르는 맨발을 보았다, 나는들었다, 발이 하는 말을발가락은 바짝 오므리고 뒤꿈치는 쳐들고그래도 뒤로 밀려 내려가거든헛발질하듯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혓바닥 죽 빼물고 땅바닥 내려다봐써레질하는 소처럼발바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바닥과 바닥은 통하는 법이야그래, 맞아둘이 하나 된 바닥은 바닥 아닌 바닥이지손바닥처럼 그냥 가닿는 대로가닿은 그곳이 바닥이니까여기, 지금, 나는바닥 아닌 바닥에서보이지 않는 발바닥을 보았고바닥 없는 바닥아슬아슬 가닿은 발바닥이 내쉬고 들이쉬는 숨소리 들었다비 오듯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 사이로리어카 바퀴가 미끄러져 내려갈 적마다발바닥은 시험에 들었다땀 한 방울 닿았을 뿐인데그 바닥은 난생처음 가닿은 바닥발가..

휠체어와 봄(외 1편) / 김정희

휠체어와 봄 -김정희 늙은 여자가 더 늙은 여자를 밀고 간다더 늙을 일이 없는 여자와늙을 일이 조금 남은 여자는 다정하다늙도록 익숙한 길더 늙은 여자의 어깨 위에조금 늙은 여자가 손을 얹는다 수국은 별을 닮았구나우주별이 내려온 줄 알았구나 보라에 희고 붉은 길의 끝으로휠체어가 굴러간다이 길을 돌면 다음 길이 있다는 걸다 안다는 듯 오래전에 알았다는 듯 두 여자 다음 계절의 처음으로 걸어간다거의 왔구나, 하면서 남지 오일장 노란 콩 두 되에까다 만 가랑파흙을 털지 않은 쑥에물뿌리개를 흔들어대는 칠순의 할머니맨홀 앞에 쭈그리고 앉아오줌을 눈다 겹겹 속곳 아래반쯤 까발린 우주속곳 올린 자리에 피어오르는천지의 흔적국물에 말아 드신 부끄럼 남지 오일장이환하다 *깁정희 시집 ㅡ 시인동네 시인선 247

겹겹이고 첩첩인 / 채상우

겹겹이고 첩첩인 -채상우 벚꽃이 피고 벚꽃이 지고 또 그 아래 벚꽃이 피고 그러는 그사이핀 벚꽃 곁에 지고 있는 벚꽃 그리고 그 곁에 피다 만 벚꽃 그 사이 그 사이들 속에 그 사이와 그 사이 그리고 사이사이들 그 사이들이 어두워졌다 환해지고 다시 어두워지는 사이 그사이그 찰나들 속의 찰나들 속의 찰나들 속의 사이 그사이와 그 사이가분별없어지는 사이 그리하여 겹겹으로 쌓이는 출세간 첩첩으로 무너지는 출출세간 무량수전 한 채 새가 두 번 우는 까닭은 왜 그렇다잖아 사람이 말야 죽기 전에 말야 사람이 죽기몇 분 전에 말야 자기가 살아온 한생을 통째로 기억한다잖아낱낱이 되산다잖아 주마등처럼 내달리는 등불처럼 어쩌면 지금이 바로 그때인지도 몰라 바로 지금이 마지막 숨결을 삼키고 있는 그 찰나인지도 몰..

꽃 진 자리 / 김은상

꽃 진 자리 -김은상  꽃이 마음인 줄 알았는데꽃 진 자리, 그 아득함이 마음이었다 외롭다는 말을 들었다그때는 그 말이 저기 저곳에서꽃이 지고 있다는 뜻인 줄 알지 못했다 내 안에 내가 흘러넘쳐어쩔 줄 몰라하던 이명, 겨울이 오고서야 알았다 외로운 사람과그리운 사람의 입술이서로의 손에 호, 호, 입김을 채워줄 수 있는 다정이성에꽃 찬란함이라는 것을꽃의 내륙에바람의 내력을 담고서야 알았다 외롭다는 말과그립다는 말의 때늦음이 겨우계절이라는 것을사랑 그후, 서성이며 일렁이며 불어오는매미의 빈 날개를 촛불 속에 적시며 알게 되었다

천원만 / 서연우

천원만 -서연우  가진 천원이 없어물메기탕 한 그릇을 나누려고 한다식당 주인이 손사래 친다저 사람은 어시장 사람들이 먹여 살린다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맛있게들 드시라 어시장 횟집 거리 화단에 앉은 천원만은모르는 사람에게아는 사람에게언제나 천원만 한다천원만의 희망은 막걸릿값이다 천원만을 데리고 병원에 다니던형은 취한 상태로 귀가하다 계단에서 굴렀다영구차가 형이 근무하던 곳을 지나던 아침천원만은그 앞에 서 있었다추위를 아는지 모르는지할 말을 혼자서만 하는두 개의 눈이 두 곳을 보고 있었다 형이, 자기보다 먼저 죽었으면 했던 취한 천원만이취하지 않은 천원만을 마신다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하면천원만막걸리값 장애인 수당이 형의 통장에 쌓이는 걸아는지 모르는지안주는 입을 닫고술잔을 계속 입을 벌린다 슬픔은 천원만과 ..

어느 푸른 저녁 / 기형도

어느 푸른 저녁 - 기형도 1그런 날이면 언제나이상하기도 하지, 나는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한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서로를 통과해 가는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 것은무방하지 않은가나는 그것을 본다 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 앉아 있다, 한 사내가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 본다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