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97

나란히 / 육호수 감상 / 나민애(문학평론가)

나란히 -육호수 소반 위에 갓 씻은 젓가락 한 켤레 나란히 올려두고 기도의 말을 고를 때 저녁의 허기와 저녁의 안식이 나란하고 마주 모은 두 손이 나란하다 나란해서 서로 돕는다 식은 소망을 데우려 눈감을 때 기도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반쪽 달이 창을 넘어 입술 나란히 귓바퀴를 대어올 때 영원과 하루가 나란하다 요람에 누워 잠드는 밤과 무덤에 누워 깨어나는 아침 포개어둔다 감상 / 나민애(문학평론가) 시는 마음의 조각이다. 낯모르는 누군가가, 내가 모르는 때에, 내가 모르는 장소에서 날려보낸 한 조각이 바로 시다. 그러니 익숙할 리가 없다. 타인의 마음 한 조각은 내 것이 아니니까 익숙하지 않아야 맞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시를 읽게 되고 시를 좋아하게 된다. 결코 내 것이 아닌 남의 마음인..

시선 2023.04.25

귤은 겁질까지 둥글고 / 임재정 감상 / 김정수(시인)

귤은 껍질까지 둥글고 -임재정 아이 두엇 물어 오느라 잇몸에 그믐을 들인 여자가 몸 일으키며 가랑잎처럼 웃는 병상에 엉덩이 디밀고 앉아 나는 봉지 귤을 까고 봉변에 놀란 도마뱀 꼬리처럼 툭 툭 끊기는 말들 가늘게 떨리는 손바닥에 노랗게 가른 귤 조각이나 건넨다 시린 일이 귀밑머리에 쌓였는지 간밤의 잔설들 암은, 아무렴 귤은 껍질만으로도 여전히 향기롭고 둥글더라, 끄덕이면 마주 끄덕이는 누이 부끄러이 더덕꽃 낯으로 그늘진 앞섶 아이 셔, 나는 돌아앉아 흐렸다 감상 -김정수(시인) 어색하고 부담스러운 자리는 자연스레 피하게 되지만, 꼭 가봐야만 하는 자리도 있다. 가까운 사람의 병문안도 그중 하나다. 시인은 귤 한 봉지 사 들고 누이가 입원한 병원을 찾는다. 병실에 들어서자 아이 둘의 엄마인 누이가 가랑잎 ..

시선 2023.02.27

어느 날 오후 / 임승유

어느 날 오후 -임승유 무슨 일이 일어났다.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보 느라 나는 아무 일도 못 했고 사람들은 왔다 갔다 한다.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느라 넓이가 생겼다. 저기 입구까지 생겨났 다. 입구로부터 누가 걸어오고 있었다. 누군지 아직 몰랐지만 알게 된다면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바닥을 치웠다. 엎드려 바닥을 치우고 있으면 바닥없는 날들이 몇 번째인지 모르겠고 이 집은 언제나 조용해서 물컵을 내던지고 산 산조각 난다. 사람들이 돌아가고 난 다음이다. 감상 -설하한(2019년 한경 신춘문예 당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 생 겼다는 예감이 들 때가 있습니다. 때때론 그 예감에 파묻혀, 나쁜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예감이 불러온 조바심 때문에 바닥에 파묻히 고 있는 이 시의 화자..

시선 2022.11.07

시니컬 / 전영관 감상 / 김정수

시니컬 -전영관 당신의 포옹은 어색해 그 안부는 등받이 없는 의자 같아서 안온함이 지속되지는 않는다 아무나 표절해도 되는 꽃말은 꽃을 선물해놓고 얼버부리는 핑게 같은 것 애인 앞에서의 눈물도 깨진 사랑을 수리해주는 천사의 접착제일 뿐 천 개의 퍼즐을 맞추는 일보다 그림 하나를 천 개로 나눈 사람이 대단해 운동화 끝이 자주 풀리는 것은 묶느라 구부리는 사이 내 안에 고인 것들이 흘러나가게 하라는 어린 귀신의 배려겠지 내일 당장의 일이면 불면으로 경고하는데 먼먼 일이라면 타인의 것인 양 잊어버리게 하는 신은 근시임에 틀림없어 내게 없다는 그 철학은 어른과 아이의 생각 차이를 화해시키는 일 감상 -김정수(시인) ..... 어려운 시를 읽다 보면 그림 퍼즐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어와 문장, 행간에 하..

시선 2022.08.11

비 / 성선경 감상 / 채상우

비 -성선경 머리는 없고 토슈즈만 있다, 가슴은 없고 토슈즈만 뛰어다닌다, 다리도 없고 종아리도 없고 토슈즈만 음계를 밟는다, 몸통은 모두 없고 토슈즈만 바쁘다, 발목 위는 없고 다 없고 토슈즈만 뛰어다닌다, 그림자도 없이 토슈즈만 뛰어 다닌다, 흙먼지 위의 흙먼지 위를 토슈즈만 뛰어다닌다, 연잎 위에 물방울이 또르르 구른다, 물방울 위의 물방울 청개구리 한 마리 또다시 뒷발에 힘을 모 은다. 감상 -채상우(시인) 쉬운 시다. 이 시에 등장하는 '토슈즈'가 '빗방울'이라는 사실을 금방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금세 책장을 넘길 수도 있겠다 싶다. 우리는 간혹 아니 실은 자주, 쉬운 시를 만나면 쉽다는 이유로 더 이상 읽기를 멈춘다..

시선 2022.08.02

나와 작은 새와 방울과 / 가네코 미스즈 감상 / 신미나

나와 작은 새와 방울과 -가네코 미스즈 내가 두 팔을 펼쳐도 하늘은 조금도 날 수 없지만 날 수 있는 작은 새는 나처럼 땅 위를 빨리 달리지 못해 내가 몸을 흔들어도 고운 소리를 낼 수 없지만 저 울리는 방울은 나처럼 많은 노래를 알지 못해 방울과 작은 새 그리고 나 모두 다르지만, 모두 좋다 감상 -신미나(시인) '새'는 하늘을 날 수 있고, '나'는 땅 위를 달릴 수 있고, '방울'은 고운 소리를 냅니다. 시인은 그 모습이 서로 달라서 좋다고 말합니다. 그의 시선은 오직 인간에게만 머무 르지 않습니다. 수직으로 뻗은 세상의 기준을 회전시켜 평등하게 둡니다. 이 시의 놀라움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서열의 높낮이를 재지 않으므로 방울도, 작은 새도, 사람도 같은 높이에 나란히 자리합니다. 쉽게 지나칠 법한..

시선 2022.07.29

또 한여름 / 김종길 감상 / 나민애

또 한여름 ㅡ김종길 소나기 멎자 매미소리 젖은 뜰을 다시 적신다. 비 오다 멎고, 매미소리 그쳤다 다시 일고, 또 한여름 이렇게 지나가는가, 소나기 소리 매미소리에 아직은 성한 귀 기울이며 또 한여름 이렇게 지나보내는가. 감상 ㅡ나민애(문학 평론가) "서정시인은 거울을 들여다보고 소설가는 창밖을 내다본다." 김종길은 한 아름다운 시인을 소개하는 글에 이렇게 적었다. 시인은 자신을 거울삼아 세계를 파악하고, 소설가는 세계를 바라보면서 자아를 찾는다는 말 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인이 거울이 아니라, 창밖을 내다볼 때는 무엇을 볼까. 답은 이 시 속에 있다. 한 노시인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한여름의 풍광을 옮겨오는데 표현이 맛깔나기 그지없다. 소나기는 멎었 으나 매미 소리는 멎지 않았다. 소나기가..

시선 2022.07.04

세계의 포탄이 모두 별이 된다면 / 이세룡 감상 / 오세영

세계의 포탄이 모두 별이 된다면 ㅡ이세룡 세계의 포탄이 모두 별이 된다면 그러면 몰래 감추어둔 대포와 대포 곁에서 잠드는 병사들의 숫자만 믿고 함부로 날뛰던 나라들이 우습겠지요 또한 몰래 감춘 대포를 위해 눈 부릅뜨던 병사와 눈 부릅뜨고 오래 견딘 병사에게 달아주던 훈장과 훈장을 만들어 팔던 가게가 똑같이 우습겠지요 세계의 각종 포탄이 모두 별이 된다면 그러면 전 세계의 시민들이 각자의 생일날 밤에 멋대로 축포를 쏜다 한들 나서서 말릴 사람이 없겠지요 총구가 꽃의 중심을 겨누거나 술잔의 손잡이를 향하거나 나서서 말릴 사람이 없겠지요. 별을 포탄 삼아 쏘아 댄다면 세계는 밤에도 빛날테고 사람들은 모두 포탄이 되기 위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릴지 모릅니다. 세계의 각종 포탄이 모두 별이 된다면 감상 ㅡ오세영..

시선 2022.06.19

오늘 내게 제일 힘든 것은 / 손진은 감상 / 반칠환

오늘 내게 제일 힘든 것은 ㅡ손진은 늦점심을 먹으러 마주 보는 두 집 가운데 왼편 충효소머리국밥집으로 들어가는 일, 길가 의자에 앉아 빠안히 날 쳐다보는 황남순두부집 아주머니 눈길 넘어가는 일, 몇 해 전 남편 뇌졸중으로 보내고도 어쩔 수 없이 이십수 년째 장살 이어 가고 있는 희끗한 아주머니, 내 살갗에 옷자락에 달라붙는 아린 눈길 애써 떼어 내는 일, 지뢰를 밟은 걸 알아차린 병사가 그 발 떼어 놓지 못해 그곳의 공기 마구 구기듯, 가물거리는 눈이 새기는 문신으로 어질어질, 끝내 못 넘어갈 것 같은 이 고개는 감상 ㅡ반칠환(시인) 저런, 때를 놓쳐서 난처하게 되셨군요. 두 집 한창 북적거릴 때였으면 눈치 볼 일 없었죠. 점심 설거지 끝내고 한갓지게 쉬는 순두부집 아주머니 눈에 들키고 말았네요. 군침은..

시선 2022.06.19

푸름 곁 / 정숙자 감상 / 김정수

푸름 곁 ㅡ정숙자 어떻게 해야 늘 그들이 될 수 있을까 바람 지나갈 때 침묵을 섞어 보낼 수 있을까 마음 걸림 들키지 않고 조용히 몇 잎 흔들며 서 있을 수 있을까 바위 햇살 개미 멧새들··· 사이 천천히, 느긋이 타오를 수 있을까 베이더라도 고요히 수평으로 쓰러질 수 있을까 구름 속으로 손 뻗으며 느리게, 느리게 바다로ㅡ깊이로만 울 수 있을까 감상 ㅡ김정수(시인) 이 시의 첫 행 "어떻게 해야 늘 그들이 될 수 있을까"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돼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화자 '나'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채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그들을 오래 지켜보며 곁으로 다가가려 한다. 불러주길 은근 기다리며 외롭고 쓸쓸한 심경을 내비친다. 그들과 함께하려면 곁으로 다가가야 하지만, 그들이 되고 싶거나 직접 만나 ..

시선 2022.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