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246

2025년 시산맥 신춘문예 시 당선작

베이비 박스 (외 5편) - 김비아 낙원에도 있고 난곡*에도 있지요지명이 바뀌어도 낙원은 구원이 열린 정원난곡이란 말은 떨어진 열매 같았죠 고양이처럼 착지하는 우리는떠날 곳만 찾아다녀남겨진 곳에는 물웅덩이만 차올랐어요 하필 이런 곳에 물방울 방이라니 하얀 손의 그루밍감싸고 있던 털이 소스라칩니다 봉제선이 조금씩 부풀어 터지려고 해요지퍼를 올리면 입술이 꿰매지는 줄도 모르고 비를 피하는 간판 뒤에서가방처럼 웅크리고 있었는데요 머리가 벗겨진 제단사가붉은 조명 아래서허밍을 자르고 용서를 자르고 빛을 자르면 그 여름이 지나갔어요 매미들의 울음이 떠내려가고 수박 넝쿨은 뽑히고아이들이 한꺼번에 물에서 걸어 나왔지요 떠나온 적도 없는데 기다린다는 말겨울을 견디려 했던 털들은 겨울을 본 적도 없고 비상구가 없는 그곳..

신춘문예 2025.02.17

2025년 전라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작

흙의 상소문 - 배은율  말 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고 싶을 때 흙은 붓을 들어 상소문을 올린다얼마 전 흙속에 이름 모를 시체가 암매장 당한 적이있다이럴 때 흙은 운다, 울음이 붓을 키운다 흙이 밀어올린 나무나 풀들은 보이는 붓이지만 아지랑이처럼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붓도 있다 그러나 보이는 붓보다 보이지 않는 붓의 힘이 더 세다 오래 전에 흙은 붓을 들어 낯빛이 다른 계절들이 서로의 낯빛을 훔쳐 달아난다고 쓴 적이 있다 이런 글은 기상이변이나 전쟁이 났을 때 쓰는 글이다 이럴때 붓은 투박한 땅의 문제로 겁 없이 흙의 상소문을쓴다 이따금 꽃가지들마다 이슬이 옮겨 앉는 일, 톡톡 터지는 이슬방울에 볼과 볼을 서로 맞대느라 바람이 물빛 아침을 잊곤 하던 일을 기억하기 위해 땅은 붓을들기도 한다 이럴 때 붓은..

신춘문예 2025.01.29

2025년 중부광역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이끼의 날들 - 이승애  흩어진 뼈를 일으키는 건 습기입니다 수억 년 전 물에서 태어나 기댈 곳 찾아 뭍으로 온 우리는 태초의 냄새를 기억합니다 음지는 우리의 몫이지요 음습한 골목길, 물에 젖은 하루가 절뚝이며 지나갑니다 언젠가 불렀던 곡조는 밟히고 또 밟혀도 살아납니다 노래가 아닌 그 한 소절을 흘리며 골목 끄트머리로 사라질 때 멀리서 바라본 혼 자만의 은밀한 기억을 녹이면 어둡고 축축한 그늘 맛이 납니다 막막함에도 내성이 생기는 걸까요 빛은 어차피 우리의 핏줄이 아니기에 더는 숨길 수 없는 조짐이 파랗게 피어오르면 하나가 됩니다 눅눅하고 미끄러운 예감으로 같은 종족을 알아봅니다 세상에서 소외된 분노는, 짓밟는 발목을 뿌리치거나 썩은 나무나 그늘진 바위를 덮기도 하지요 이때 우리의 피는 온통 뜨거운 녹..

신춘문예 2025.01.27

2025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생각하는 나무 - 이문희  나는 몽상가답게 낙천적이죠구름모자를 즐겨 써요서서 먹고 서서 자는 동안에도 반짝반짝 사색을 즐기죠이파리가 많다는 건 생각이 많다는 증거랍니다그래서 외롭지도 외로운 줄도 모르죠빽빽한 생각에 몰두하다 보면 궁금한 게 참 많아요덩굴장미는 용암의 뿌리에서 분출한 식물성 화산일까바다가 파도 창고라면 하늘은 구름 공장일까누가 저 많은 구름들을 져 날랐을까매미에게는 몇 마력 울음의 엔진이 장착된 걸까또 이런 생각도 해요하늘에 갇힌 별들은 자유로울까물고기는 어디로 날아가려 지느러미를 가진 걸까무지개는 하늘 놀이터의 미끄럼틀일까 아니면하늘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일까나는 새들에게 의자를 내어주는 게 취미라면 취미 노래를 하고 싶거나한바탕 춤을 추고 싶을 땐 바람 몰이꾼이 되어요매일매일 석양을 바라..

신춘문예 2025.01.24

202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폭설 밴드 - 노은  팝콘은 함성이라서 우리는 스네어 드럼을 밟는다산과 하늘의 경계가 흐려지는 시간이 오면저 멀리서 늑대의 우두머리가 하울링하는 소리가 들렸다교실 안 아이들의 핸드폰에 폭설 경보음이 울리고뒤적거리다 발견한 서랍 속에서 눅눅해진 팝콘밴드 합주실은 꼭대기 층에 있어서아이들은 지붕 없는 교실에서 자습을 했다쿵, 쿵우리는 무언가를 떨어뜨리기도 하였는데무언가와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는 생각보다 커서옥상에서 어떤 아이가 얻어터진다는 소문이 학교에 돌았다누군가 죽은 게 아니어서 다행이라고너는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퓨즈가 나가고 모두 조용해지는 한 순간기억 속의 학교는 영원히 어두울 것만 같아,내가 말했다셀 때마다 달라지는 계단의 수잡히는 대로 꽉 쥘 수밖에 없어서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하얗게 질린 ..

신춘문예 2025.01.22

2025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책가도 - 이수국  나는 살았지만 죽은 사람 오크 향 원목 책장을 창문 앞에 세웠다 책을 좋아한 왕이 책가도(冊架圖)를 세워 일월 오봉도를 가렸듯 햇살과 달이 가려진 방 창틈으로 들어온 빛이 어둠을 가른다 박물관 유리문 너머 책가도 가로와 세로의 배열 속, 그림 위에 꽂힌 천년의 페이지들 그림 속 책을 보던 왕과 유리문 안을 보는 내 눈이 책가도 위에서 만났다 그림 한구석 은밀히 쓴 화공의 이름이 흔들렸다 책장 바닥에 그늘 한 권을 괴자 몸이 중심을 잡는다 무너지던 중력을 다시 세운 건 한 권의 책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기대고 있는 책을 꺼내면 그들의 체온이 손끝을 타고 가슴으로 전해오고 작가를 지우며 작가를 꽂는다 이럴 때 사전을 거역하는 것은 유쾌한 일 문장이 자라는 동안 스위치를 켜면 책과 나는 ..

신춘문예 2025.01.20

2025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카카리키 앵무 -이주경  조용히 우는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주전자 물 끓는 소리보다 작게 울어도 가둔다 미풍에 머리카락 날리는 소리보다 작게 울어도 가둔다 창문보다 낮게 목소리 죽이는 아이, 이웃집엔 중문도 방음벽도 없단다 얌전히 울면 해바라기 씨를가득 줄 테야 호기심 많은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탁자 위에 놓인 꽃병을 쪼아대도 가둔다 짧고 단단한 부리로 백합 꽃잎을 쪼아대도 가둔다 동글동글한 눈빛으로 수도꼭지를 툭툭 건드려도 가둔다 집안에서 제일 예민한 각도로 웅크리는 아이, 이웃집엔 꽃병도 수도꼭지도 없단다 너의 호기심을 잠그면 해바라기 밭을 줄 테야 혼자 놀기 좋아하는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오후 햇살이 올리브색 깃털 위로 미끄러져도 가둔다 건반 위를 콩콩 뛰어다니기만 해도 가둔다 깨지지 않는 거울을보..

신춘문예 2025.01.19

2025년 현대경제 신춘문예 시 당선작

파밭 - 엄경순  하얀 다리를 걷어 올린 푸른 대궁채마밭 굵은 파들이 쑥쑥 자란다대궁 안은 한 숨 두 숨 잔뜩 부풀었는데속내를 알 수 없는 통통한 옆구리를청개구리 한 마리가 발가락으로 간질인다세상을 머금은 듯 단단히 여민 대궁아무리 흔들어도 속을 보여주지 않는다꺾지 않으면 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다속을 보려고 대궁을 꺾을 수는 없다대궁 안에 들어 있는 작은 세상가만히 숨죽여 귀 기울이면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답을 찾을 수 없는 일들이끙끙 속을 태우며 들어앉았다가말문이 터지득 어느새 쑤욱 답을 밀고 올라와파바밭! 꽃대 위에서 하얀 꽃망울로 터진다파밭에서는 꽃이 필 때마다나비랑 벌 무리 좋아라 야단법석이다대궁은 여전히 무슨 궁리 그리 깊은지하얀 꽃 속 까만 씨들이 응어리처럼 영근다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비밀이 있..

신춘문예 2025.01.19

2025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산사 - 최원준  범종 소리에겨울 은사시나무가 흔들리고송백에 남아 있던 가느다란 푸른 선이 흔들리고밤을 지켜보던 소쩍새 눈동자 흔들리고범종 소리는옹송그리며 가지에 점으로 앉은꽃봉오리를 툭 하고 건드리고툭 하고 밀치면서 서로 얼싸안기도 하고그리하여범종 소리에소스라치게 놀란 매화나무는 가지에꽃을 점점이 피워낸다. 고요가 있고, 적막이 있고그 속에 소란이 있고달빛이 돌그림자를 움직이는 동안범종 소리에계곡은 파문을 일으키고,바람 따라 그 소리 배회하다가팔상도 쓰다듬으며부처님 안전에 매화향 전해주면범종 소리에밤은 끝을 비추고동쪽 산은 붉은 점안식 준비를 재촉하였다.  * 심사위원

신춘문예 2025.01.15

2025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란 경전 - 양점순  나비는 비문을 새기듯 천천히 자수 병풍에 든다아주 먼 길이었다고 물그릇 물처럼 잔잔하다햇빛 아지랑이 속에서 처음처럼 날아오른 나비 한마리 침착하고 조용하게 모란꽃 속으로 모란꽃 따라 자라던 세상 사랑채 여인 도화의 웃음소리대청마루에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운 아이모란 그늘 흩어지는 뒤뜰 흐드러지게 피는 웃음소리그녀가 갈아놓은 먹물과 웃음을 찍어 난을 치고나비를 그려 넣는 할아버지 상처를 감춘 꽃들이할머니 손끝에서 툭툭 핏빛으로 핀다어떤 날은 긴 꼬리 장끼와 까투리가 태어난다 어디서나 새는 태어나고 어디서나 날아가 버리곤 한다 모란이 핀다, 모란이 핀다 붉은 꽃잎을 따서 후하고 불어 보는 아이꽃잎은 빙빙 돌며 아랫집 지분 위로 날아간다그 집 할아버지가 죽었다고 한다 모란 꽃잎 불어 날..

신춘문예 2025.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