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상 71

시향 문학상 (이진주 시인)

분기점 (외 1편) -이진주 나는 얼굴이 없습니다 목적지를 단단히 입력해 주셔요 자!달리고 달립니다어판장 건물이 보이고 갈매기 떼 모여들었다빈 하늘에 흩뿌려집니다 졸음 쉼터가 보이네요안심하셔요 나는 졸지 않습니다 분기점이 문어발처럼 갈라져도나는 웬만해선 헷갈리지 않습니다당신이 믿어만 주신다면 당신이 지나온 길 어땠나요갈래 길 앞에 서서 헤매진 않았나요나는 발자국이 없습니다 삐 ㅡ경고문이 울립니다너의 동선은 기록된다너의 과오는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얼굴이 없습니다 예쁜 목소리가 있죠당신의 경유지와 목적지는 기록됩니다 빗살무늬 꽃 하루에도 몇 번씩 칼춤을 춘다나의 등에피비린내 어른거린다 퍼덕거리는 삶의 딘말마나는 등을 내밀어 아픔을 받아낸다절절 아우성이 빗금을 걷는다 웃통을 벗은 인부의 등에빗살무늬 ..

문학상 2025.04.30

2025년 제주 4.3 평화문학상 시 당선작

흰 문장 -김 휼 흰 문장을 읽는다 묵음의 무게가 심장보다 무거워 주저앉은,매번 다른 말로 읽히는 줄거리의 결말은 열려있다 어느 날 돌아보면 주어가 바뀌고 서술어에 붙어 안긴문장은 목적어를 내게 물어온다 기록과 기억 사이지워야 완성이 되는 이 문장의 방식은 믿음을 요하는신앙에 가깝다 아버지가 생략된 나에게 봄은 언제나 바깥이었다 술잔을 돌리는 손목 끝에서 그려지는 동그라미는떠난 자의 영혼, 어떤 부재는 너무 구체적이어서 더듬다 보면 젖기도 했다 무명천으로 동여맨 얼굴을 더듬듯 백비*를 읽는다 울음에서 시작된 짐작들로 채워진 이 침묵의 경전은 나비가 되기 전에 읽어야 할 생의 목록일진대, 환부를 감싼 흰빛 위에 빽빽이 채워진 말 교열이 어긋난 이 비문을 누가 해독해 줄까 등 돌린 괄호에 질문이 잠기고부재..

문학상 2025.04.27

제 26회 전태일 문학상 수상 작품

방아쇠수지증후군 - 강성남  오른쪽 엄지가 말을 듣지 않는다일자로 굳어 구부러지지 않거나, 기역자로 구부러진 채펴지지 않기를 반복한다억울한 맘이 들었는지 자다가도 심통을 부린다 손가락 하나를 지나치게 부려먹었다힘줄이 부어 마디와 마디 소통이 안 된다물건을 집는 것은 물론 매듭을 풀거나펜을 집는 일, 문 여는 일조차도 힘겁다 힘줄 몇 가닥이 손목과 어깨, 생활 전체에 통증을 준다주사를 맞고 레이저 시술 10분, 파라핀 요법 20분, 탈리플루메이트 정, 에렉신 정, 아르티스 정약부작용이 있다하니 페니라민 정까지 처방해준다 낫으로 무를 자르다가 검지를 잘랐던 어머니국문과에 가고 싶다는 내게, 동생들은 어떻게 하냐고내 꿈을 단칼에 자르셨다나는 떨어진 지골이 되어 팔딱팔딱 뛰며 울었다 손에 화농이 잘 드는 큰 동..

문학상 2025.02.18

2024년 천강문학상 시부문 대상

분봉 -김경숙  분봉 중인 아까시꽃들새로 생긴 나뭇가지 끝으로 한 뭉치꽃무리가 부풀어 갑니다 저건, 분명히 벌들에게 배운 방식일 겁니다. 꽃들은 벌의 속도로봄밤과 초여름 밤을 날고 있습니다.어느 마을에선 알전구들이 집단 폐사했다고 합니다만똑딱, 피고 지는 스위치들 주변은늘 거뭇한 먹구름이 끼어 있기 마련입니다. 분봉 속엔 한 마리 중심이 붕붕거립니다.마침표 하나가 막아버린 벌통 입구를 오해라 말하지만오해를 직역하면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중심은 자라는 것이 아니라나뉘면서 생기는 일이니까요. 오늘 밤엔 꽤 먼 곳까지 벌들이 날아갔다 오려나 봅니다. 북두칠성 부근에서 가뭇한 벌 한 마리가 밤나무 한 그루를 몇 센티쯤 여름 쪽으로 끌고 간 것이 보인다면 그쯤, 텅 빈 새 벌통을 가져다 놓기 좋은 장소일 것입니다..

문학상 2024.07.17

제 31회 전태일 문학상 / 안철수

소음 공장 -안철수  오후 네 시는 손톱 밑이 까매져서 손톱이 잘 자라요소음방지 귀마개에종이컵 그득 물 한 잔 마시면 꽃은 피고요 비가 내리지 않아도 나무는 잘 자라요사막인데 오아시스도 없이껍질을 열면 소음이 무성한데요잘 자라는 나무의 영양분이죠 고장 난 나무에서풀린 볼트가 낙과처럼 굴러다녀요 한 번쯤 비보다는 눈이 보고 싶은데요눈 덮인 노르웨이 숲 오로라를 보고 있는 전나무처럼요오늘은 새벽별과 저녁별 사이에 미세먼지가 심해요 지나가는 화물차를 부르고 있어요뿌리채 뽑아 나무를 먼 곳에 보내주고 싶거든요어디서든지 뿌리는 말을 잘 들으니까요 그 먼 나라는요바다가 있고 강도 있고 계곡도 있어요그러니까 말 잘 듣는 손과 발이 필요한 거죠잠깐! 이 시간은 배가 많이 고파요컵라면 하나 먹고 다시 시작할게요 고장 난..

문학상 2024.07.12

2024년 현대문학상 수상작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김복희 쌀 씻는소리 오이를 깎는소리 수박을 베어 무는소리 미닫이 문이 드륵드륵 닫히는 소리 딱 하나면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지고 갈까 앞으로 내가 듣지 못할 것 남도 듣지 말았으면 하는 것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면..... 조용히 우는 소리 틀어 놓은 텔레비전 위로 막막한 허공의 소리 손톱으로 마른 살갖을 긁는 소리 죽은 매미를 발로 밟는 소리 이것 중에 무엇이 좋을까 잠시 고민했다 이런 거 맞나요? 나는 물었고 대답은 없었다 누가 벌써 대답을 가져간 것일까 다 두고 갈 수는 없나요? 아주 조용했다 누가 벌써 가져간 게 확실했다 가질 수 있는 것을 가지지 않을 때의 기쁨 잠든 사람이 따라하는 죽은 사람의 숨소리 죽은 다음에도 두피를 밀고 나오는 머리카락 소리 벌려 놓은 가슴을..

문학상 2023.12.23

건들거리네 / 조창환 (목월 문학상)

건들거리네 조창환 범생이가 건들거리며 땅끝마을 바닷가를 거닐고 있네 바람도 없는데 파도도 조용한데 아직 못 해 본 일 많은데 범생이는 건들거리네 벙거지 눌러쓰고 반바지에 슬리퍼 끌고 제멋대로 건들거려보네 막힌 데 앞에서 돌아갔고 허물지 못하고 비켜 갔던 범생이의 한 생은 후회가 많아 제 몸 하나 건들거려보는 일에도 흥이 솟네 평생 못 안아본 사람 안아보고 싶기도 하고 평생 못 만져본 고래 만져보고 싶기도 하지만 부질없고, 헛대고, 망령스러워 다 잊어버리기로 하네 잊어버리고 그냥 건들거리기만 하기로 하네 새의 춤 빨간 발끝으로 모래톱에 얉은 지문을 남기며 새는 작은 공처럼 튀어간다 비눗방울 같다 새가 추는 춤 꽃그늘 흩트리는 발레리라 같고 암각화에 찍혀진 고래 숨소리 같다 그렇지? 거기 환하게 철썩거리는 ..

문학상 2023.11.24

(2023년 수주문학상) 먹갈치 / 조수일

먹갈치 -조수일 야행성이었다 달이 뜬 후에야 낡은 통통배를 밀고 바다로 향했다 대낮엔 모래 틈이나 펄 바닥에 엎드려 밤을 기다리는 갈치를 닮았다 딱 한 번 흙탕물에 발이 빠졌을 뿐인데 당신의 얼룩은 평생을 따라붙었다 어듬이 더 편한 밑바닥의 생 북항의 밤은 늘 멀리서 찬란하였다 날렵한 지느러미에 주눅 든 새끼들을 싣고 밤하늘의 유성을 따라가고 싶을 때도 있었을까 은빛의 유려한 칼춤으로 자신의 바다에서 단 한 번의 도어刀漁가 되어 본 적이 없는 아버지 갈라터진 엄마의 울음이 뻘밭에 뿌려지던 날 마지막 실존이었던 은분銀粉마저 다 털려 유영의 꿈을 접었던 평생 들이켠 바다를 다 게워내느라 갑판 위가 흥건했다 짠물을 다 마시고도 채우지 못한 허기 삶을 지탱하는 힘이 어쩌면 꿈을 좇는 허영인지도 모른다 바다의 깊..

문학상 2023.10.06

제11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영남동 -한승엽 한라산 남쪽 아래 첫마을 안개가 귀뜸해준 얘기 때문에 옷깃을 여미고 있다 이윽고 무리 지어 올라오는 광기의 눈빛에도 머릿속은 말라버린 층계 밭에 갇혀 멈칫멈칫 헤매는데 악몽처럼 올레는 아찔한 소란에 어둑해지고 고막을 때리듯 문짝이 부서지더니 지붕이 활활 타올랐다 와들와들 울부짖는 불기둥, 신들린 것 같았다 기댈 벽도 없이 저절로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대물림할 수 없는 것들만 넋 나간 채 나뒹굴고 한 죽음이 또 다른 죽음의 눈을 감겨주는 찰나에도 우물에 갔다는 누이도 연기처럼 돌아오지 않아 숯검정을 쓴 채 정체 모를 벽에 휩싸여 검은 하늘이 지붕이고 잃어버린 번지수가 달빛에 걸려 있었다 그러나 서성거리는 우주의 끝에선 잠들지 않는 물소리가 흰 그늘로 길에 흘러가고 늑골로 빠져나간 바람까마귀..

문학상 2023.04.03

시와편견 문학상 / 복효근

눈물 찬讚 -복효근 1 눈물이 별이 된다는 것을 꼭 믿진 않지만 눈물이 굳어 돌이 되지 않는 걸 보면 눈물이 별이 되지 않는다고 굳이 믿지 않을 이유가 없지 2 어떤 별은 다이야몬드로 이루어진 것도 있단다 다이야몬드별에서는 꽃이 피지 않는다 내 몸이 흙으로 빚어진 것은 얼마나 행운인가 그러니 울어라 2 울면서 태어나고 울면서 살다가 울면서 죽어도 이 별이 아니고서는 그럴 수가 없다 눈물 뒤에서 꽃은 피고 별은 태어난다 그 사이로 별이 떴다 오후가 되자 바람이 잦아들고 서녘하늘엔 노을이 깔리기 시작했다 꽃 핀 쑥부쟁이 몇 포기를 피해 예초기가 에둘러 지나 간 자리 산책길엔 고라니 똥 한 무더기 우린 그렇게 길을 함께 나누어 쓰고 있었구나 고라니도 한참 하늘을 올려다보았겠다 매에 쫓기던 새들도 지금쯤 둥지에..

문학상 2023.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