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57

2025년 서울신문 (외 2편) 시조 당선작

달을 밀고 가는 휠체어 - 박락균  물비늘 일으킬 때 주저앉는 여름밤내려온 눈썹달이 당신 뒤를 밀어주면휠체어 해안선 따라 바퀴가 걸어간다 당신의 마디마디 달의 입김 스며들어번갈아 끌어주는 밀물과 썰물 사이눈동자 물결에 멈춰 어둠을 다독인다 바닷가에서 태어나 뭍에서 사는 동안파도만큼 추렁여 눈 뜨고 산 새벽처럼발자국 병상에 누워 허공을 걷는 어머니  *심사위원    한라일보 시조 당선작  뜨게질하는 여자 - 박숙경  맞은편 유리창 속 나 같은 여자 하나구겨진 종이 가방 무릎 사이 세워놓고안뜨기 바깥뜨기로남은 오후 짜 늘이네 실마리 움켜잡고 내달리는 두 개의 손바늘 끝 시선까지 한 코씩 엮어내면상상을 더하지 않아도이미 따뜻한 겨울 살다 보면 가끔씩 그럴 때 있기도 해덜컹 덜컥 흔들리다 저절로 아귀 맞는 까무..

시조 2025.02.09

2025년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동아일보 절연 / 류한월  불꽃이 튄 자리엔 그을음이 남아 있고뭉쳐진 전선 끝은 서로 등을 돌린 채로흐르던 전류마저도 구부러져 잠들었다 구리 선을 품에 안은 검은색 피복처럼한 겹 두 겹 둘러싸는 새까만 침묵으로철로 된 마음속에서 절연되는 가족들 한 번의 접점으로 미세 전류 흐르는데묻어둔 절연층엔 전하지 못한 말들이심장의 전압 내리고 가닿은 길 찾으려 * 심사위원    경상일보 인사이더 식사법 / 오향숙  푸성귀 같은 날들 집으로 가져와서큰 그릇에 버무리면 사람이 모여든다내 편과 네 편의 입맛 한때는 겉돌아도 속속들이 배어든 유연한 참기름 말제 각각 살아있는 뿌리의 속마음은밖으로 내뱉지 않아 싸울수록 순해진다 싱거운 나의 하루 쓴맛이 녹아들어혀가 만든 비법 하나 스며든 인사이더싱싱한 유일한 재료 입 닫고 ..

시조 2025.02.03

2025년 조선일보, 농민신문 시조 당선작

취급주의 - 한승남 계단을 오르내리며 슬픔을 운구한다얼굴 없는 수취인 이름도 희미해졌다똑똑똑 대답 없는 곳긴 복도가 느려진다저 많은 유품들은 누가 보내는 걸까주문을 외우면 외로운 착각의 세계반품도 괜찮을까요열지 못한 사연들상자도 사람도 구석에서 자라고 있다유리 같은 마음입니다 던지지 마세요날마다 포장된 시간기적을 쌓는다 * 심사위원 * 심사평 : 택배와 함께 나날을 사는 현 세상의 면목을 '취급주의'로 집어낸 발상과 이면의 성찰이 울림을 준다 농민신문 시조 당선작 어떤 광합성 -김영곤 병실에 누워있다, 깡마른 나무 한 그루한뉘 내내 둥근 세상 사각 틀로 깎아내다제 몸을 보굿*에 끼워몸틀처럼 앙버티는, 무엇을 기다릴까, 천 개의 귀를 열고한 번도 부화하지 않은 톱밥의 언어들이끝내는 해독 못한 채침..

시조 2025.01.31

이상기후 / 정상미

이상기후 -정상미 우기를 파내다 발이 푹푹 빠졌어요 구름이 웃자라 눈가가 무른 지난여름 갈라진 우리 사이를 조롱 하는 번개들 천둥이 시간을 깨면 소스라치는 울음통 성난 강물은 범람해서 지하도를 삼켰어요 화나면 수장해 버리는 지구의 무지막지 판이 흔들려 어긋나는 당신과 나처럼 길은 진창에 누워 일어나지 않고 발목은 징후의 늪에서 돌아오지 않고 *나의 생각 이상기후란 시는 첫 연에서 푹 빠지게 한다 우기를 파내다 발이 빠지고 구름이 웃자라 눈가가 무르다는 표현도 너무 좋고 지구를 가지고 당신과 나의 대비가 너무 잘어우러져 있다 참 좋다.

시조 2023.12.12

페이스메이커(외 2편) / 정상미

페이스메이커(외 2편) -정상미 맨 앞을 끌고 가는 바람막이 촛불 하나 어느 순간 꺼져야 할 비운의 단막에도 기꺼이 역을 맡는다 높바람 미당긴다 지친 몸 다 털어내 더는 춧불 아닐 때 웅그린 바깥을 밀어 저 멀리 앞세우는 한 번도 중심이 되어 살아본 적 없는 사내 한 얼굴이 바람을 연다 다른 얼굴 만나서 외로운 길 마다 않고 앞을 밝히며 나간다 심지가 다할 때까지 나를 당긴 아버지처럼 촉 밝은 전구 수직을 잃은 엄마 긁는 병이 생겼나 머릿속 알전구 희미하게 깜빡일 때 쟁여둔 설움은 터져 피가 나야 멈춘다 장갑을 끼워두면 물어뜯어 벗겨내고 무엇을 들려줘도 금세 던져버린다 온밤 내 튕겨난 잠에 말들이 날뛰는 방 궁리 끝에 지폐 모아 식판에 올려두면 고요해진 얼굴로 하나하나 집어 든다 사임당 이불 속으로 맨 ..

시조 2023.11.11

스트랜딩 / 나정숙

스트랜딩 (중앙 시조 백일장 10월 장원작) -나정숙 라일락 이파리는 첫사랑의 비린 맛 한 잎 떼 넣어주던 바다 빛 눈동자에 수줍은 이야기들이 글썽글썽 걸려있다 수평선 꼬리에 걸고 바람살 조준하면 돋을볕 과녁에서 터지는 금화살들 C단조 휘파람 소리 촤르르 쏟아진다 물결 위 되돌이표 출렁이는 기억 너머 목구멍 동굴 속엔 해초들 자라나고 검은 새 슬픔을 향해 일제히 고개 돌린다 한때의 물길 따라 서투른 사랑 가고 마지막 호흡 닫고 바다 깊이 몸을 던진 돌고래 루시드 드림파도 울음 한 자락

시조 2023.11.02

청령포 / 임채성

청령포 -임채성 그댄 천리 밖에 있고 나는 물에 갇혀 있네 마른 자리 하나 없는 육지 속 섬에 들어 숨죽여 몸부림치는 강물 소리 듣는다 잠 못 든 솔부엉이 마른 기침 토 하는 밤 달빛에 솔 그림자 창검처럼 어른거리고 또 누가 강을 건너는지 나루터가 수런댄다 칼을 든 아침 동살 어둠발을 베고 나면 한 자락 꿈결 같은 이 봉인도 풀릴까 새벽이 치마를 끌며 문지방을 넘는다

시조 2023.07.13

그늘 (외 2편)/ 백윤석

그늘 (외 2편) -백윤석 공평한 볕살 바라 나는 늘 꿈을 꿔요 문명의 이기 따라 볼모처럼 살아가도 언젠가 불시에 나타날 그대를 기다려요 늘 오는 바람조차 발길 끊은 어느 봄날 늦잠 자는 잔설 깨워 제 갈 길 재우쳐도 한구석 퍼질러 앉아 떠날 줄을 몰라요 그랬죠, 내가 느루 때는 곧 온다라고 뙤약볕 더운 입김 가뿐히 잠재운 날 그늘을 지우며 오는 당신 멀리 보여요 너도바람꽃 바람을 되찾으러 그녀들이 나섰다 태극기 품에 안고 쓰러져간 그날처럼 창칼에 겁내지 않던 삼월의 만세 소리 한 사내 사막을 가로지르는 한 사내가 있었네 기왕에 내친 걸음 되돌릴 방법 없어 낙타초 우물거리는 한 사내가 있었네 사는 건 물도 없이 사막을 건너는 일 모래바람 앞길 막고 신기루 유혹해도 끝끝내 갈 길 재우치는 한 사내가 있었네..

시조 2022.10.11

흑산도 가는 길 / 백윤석

흑산도 가는 길 -백윤석 구슬 꼭 쥔 조막손*에 달구지는 멈춰 섰다 바람이 재촉하다 잠시 쉬는 이별 앞에 때 아닌 천둥번개도 하늘 찢고 울었다 절망이 너울 치는 흑산도 가는 뱃길 집채 파도 뱃전 넘어 황포돛대 위협해도 절망은 또 다른 희망, 하늘에 몸 맡기고 바다는 국문하듯 나를 자꾸 채근했다 죽음 잠시 두려워져 설핏 그분 등졌으나 남은 생 이 꽉 깨물고 속죄하고 싶었을 뿐 길은 또 다시 암전, 창살 없이 날 가두고 시랑고랑 앓는 속내 가다루어 일으켜도 갈마든 밀물, 썰물을 감시하듯 번을 섰다 죽지 꺾인 가마우지 하늘 접고 바다 날 때 비척이는 그림자로 고갯마루 넘어 보다 아차차! 하 널린 시간, 초를 재고 있었다니 귀천貴賤은 팽개치고 허울도 벗어던지고 사람이 파도로 와 외로 선 나를 삼키면 한구석 가만..

시조 2022.08.04

페이스메이커 / 정상미

페이스메이커 ㅡ정상미 맨 앞을 끌고 가는 바람막이 촛불 하나 어느 순간 꺼져야 할 비운의 단막에도 기꺼이 역을 맡는다 높바람 미당긴다 지친 몸 다 털어내 더는 촛불 아닐 때 웅그린 바깥을 밀어 저 멀리 앞세우는 한 번도 중심이 되어 살아본 적 없는 사내 한 얼굴이 바람을 연다 다른 사람 만나서 외로운 길 마다않고 앞을 밝히고 나간다 심지가 다할 때까지 나를 당긴 아버지처럼

시조 2022.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