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이나 겨우 먹고 삽니다 / 석민재 밥이나 겨우 먹고 삽니다 -석민재 최소한 1회전은 무조건 맞아라 명심해라 2회전은요? 계속 맞아라 그럼 상대는 더 기고만장할 텐데요? 너무 창피하잖아요, 나만 맞으면 3회전 30초만 남겨 놓고 딱 한번만 공격해라 왜 자꾸 의욕을 꺾으십니까? 넌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집에 가서 잠이나 푹 자라 맘에 들지 않겠지만, 전 맞기 싫습니다 힘을 모으는 법은 맞아 보는 게 제일 정확하다, 얘야 제발 싸움만은 하지 말거라. 얘야 흥미 있는 시 2023.02.23
조퇴 / 강희정 조퇴 -강희정 드르륵 교실문 열리는 소리 슨상님 야가 아침만 되면 밥상머리에서 빗질을 했산단 말이요 긴 머리카락 짜르라 해도 안 짜르고 구신이 밥 달라 한 것도 아니고 참말로 아침마다 뭔 짓인지 모르것어라 킥킥 입을 가리고 웃어 대는 책상들 아버지는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낮술이 뺀질뺀질 빨갛게 웃고 있는 4교시 수업 시간 덩달아 붉어진 내 얼굴은 밖으로만 내달리고 싶어 아버님 살펴가세요 어서가세요 애들아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일찍 점심 먹고 운동장 나가 놀아라 나보자 먼저 교실 밖으로 나가버린 선생님 달걀 프라이가 들국화처럼 피어 있는 생일 도시락이 아버지 손을 잡고 산들산들 집으로 간다 *시 속에는 자기 자신이 들어갈 '자리'를 과감할 정도로 배제시키는 능력으로 완성도 높은 시 흥미 있는 시 2022.12.20
줄넘기 / 최성애 줄넘기 ㅡ최성애 줄넘기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나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 고양이가 배를 드러내고 나의 한쪽을 베고 낮잠을 잘 때와 같은 거다 한쪽만으로도 나의 전부를 믿어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오늘은 줄이 없는 줄넘기를 고른다 하찮은 일은 줄이 없어도 꼬이는 것 같다 손잡이에는 긴 줄 대신에 새로 나온 리듬을 단다 리듬은 춤을 추듯 계단을 뛰어 넘는다 줄넘기가 발전하니 나도 따라 발전한다 줄넘기를 하면 숨이 가쁘기도 하고 누가 자꾸 쫓아오는 것 같다 한 자리에서 나는 계속 도망친다 두 발이 공중에 뜰 때 나는 여기 없는 사람이다 흥미 있는 시 2021.12.27
수영약국 / 김두안 수영약국 ㅡ김두안 새가 드나들어 꽃이 핀다 가지가지 가지에 일요일이 터진다 뭘 보여 줄까 흔들리는 것 파르르르 빛이 쏟아지고 있어 너의 이름에서 거짓말이 보여 수영약국 앞에 잠든 아이는 당신이 가져가 우리의 잘못은 지금이 적당해 그만 그만 너의 기도 위에는 어깨 아픈 새가 앉아 있어 뭘 보여 줄까 같이 흔들리는 것 우리는 거리의 나무야 가지, 가지에 잘못이 드나들어 꽃이 핀다 수영약국 앞에 잠든 아이가 저녁으로 걸어간다 흥미 있는 시 2021.12.03
꽃팬티 꽃밭 / 곽성숙 꽃팬티 꽃밭 ㅡ 곽성숙 기념일이면 자매간에 꽃팬티를 선물하는 어머니와 이모님들 고목 같은 그들의 수다는 모처럼 노란 병아리들처럼 귀엽다 노랑 꽃팬티는 면이 더 좋고 주황 꽃팬티는 입는 맛이 더 좋단다 "언니가 이것 입소 아니다 니가 입어라" 밀거니 받거니 한참을 소란스럽다 그 왁자지껄함 속에서 기쁨의 물기와 웃음의 햇빛을 받으며 저마다의 한송이로 벙글어 보는 중이다 꽃밭 가를 서성이는 나를 보고 한송이의 어머니가 눈빛을 건넨다 너는 아직 분홍 꽃으로 피거라 분홍 꽃밭 한 평 분양 받아 나오는 등 뒤에서 까르르, 웃음보가 터졌다 흥미 있는 시 2021.05.01
파과(破瓜 )1 / 신미나 파과(破瓜)1 ㅡ 신미나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목사님이 말했는데 손가락이 하나 없는 언니의 머리는 쓰다듬어주지 않았다 현금함이 돌아오면 우리는 현금하는 시늉을 했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 말해보라고 했다 콧등을 내려다봤을 뿐인데 너희는 착하구나 부끄러움이 뭔지 아는구나 해바라기가 해를 원망하며 비를 기다릴 때 고사리처럼 몸을 비틀며 지렁이가 죽어갔다 복숭아가 있는 정물 그대라는 자연 앞에서 내 사랑은 단순해요 금강에서 비원까지 차례로 수국이 켜지던 날도 홍수를 타고 불이 떠내려가는 여름 신 없는 신앙을 모시듯이 내 사랑에는 파국이 없으니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과즙을 파먹다 그 안에서 죽은 애벌레처럼 순진한 포만으로 돌이킬 수 없으니 게속 사랑일 수밖에요 죽어가며 슬은 알 끝으로부터 시작으로 들.. 흥미 있는 시 2021.03.29
돌탑을 받치는 것 / 길상호 돌탑을 받치는 것 ㅡ 길상호 반야사 잎 냇가에 돌탑을 세운다 세상 반듯하기만 한 돌은 없어서 쌓이면서 탑은 자주 중심을 잃는다 모난 부분은 움푹한 부분에 맞추고 큰 것과 작은 것 순서를 맞추면서 쓰러지지 않게 틀을 잡아 보아도 돌과 돌 사이 어쩔 수 없는 틈이 순간순간 탑신의 불안을 흔든다 이제 인연 하나 더 쌓는 일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 벌어진 틈마다 잔돌 괴는 일이 중요함을 안다 중심은 사소한 마음들이 받칠 때 흔들리지 않는 탑으로 서는 것, 버리고만 싶던 내 몸도 살짝 저 빈틈에 끼워 넣고 보면 단단한 버팀목이 될 수 있을까 층층이 쌓인 돌탑에 멀리 풍경 소리가 날아와서 앉는다 흥미 있는 시 2020.11.21
그러했으면 / 문성해 그러했으면 ㅡ 문성해 날아가는 오리 떼가 슬쩍 행렬을 바꾸어 가듯이 내가 너를 떠올림도 그러했으면 오리가 슬쩍 끼어든 놈에게 뭐라고 타박을 하듯이 내가 너를 탓함도 그러했으면 날아가는 오리 빨간 발이 깃털 속에서 나란하듯이 우리가 서로를 바라봄도 그러했으면 날아가는 오리 떼가 한순간 휙 방향을 바꿀 때 마지막 한 놈도 그 꼬리를 놓치지 않듯이 내가 너를 마냥 떠올림도 그러했으면 높고 멀리 날아가는 오리 떼가 그냥 정처 없음이 아닌 것처럼 내 그리움의 산정에서 동그마니 네가 기다려줌도 그러했으면 흥미 있는 시 2020.11.17
물을 따라 번지는 불의 장미 / 진혜진 물을 따라 번지는 불의 장미 ㅡ 진혜진 더 처음으로 가면 끈에 묶인 물고기자리와 통하는 물, 그러므로 나는 불 붉은 색은 인주처럼, 왜 풀어지는 장미목줄 사라지는 도장을 새긴 것일까 물결치는 당신에게 휩쓸리면 허우적거리는 나를 삼켜버릴 것 같아 나는 물을 따라 번지는 불 불이 숨을 쉬면 전체가 소문이야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일까 헤어지자 우리 우린 닮아서 다름과 다름 아닌 것도 증명하는 서로의 극, 불에도 비린내 도드라진 몸이 문장으로 박히고 붉어지는데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백 번 결별하고 수천 번 감정을 사고팔지 수는 목 화는 토와 통한다는데 신뢰 앞에 증인으로 소화된 당신은 끝까지 수, 나는 마침내 화 좋았던 기억은 유실물, 증인이라는 유일한 가능성 더 장미의 바닥으로 가면 발바닥이 없고 만발했던 계약.. 흥미 있는 시 2020.07.02
물다 / 김수상 물다 ㅡ김수상 원기사 가는 길 가파르다 하도 가팔라서 땅을 물고 간다 옆도 뒤도 돌아보지 못한다 땅만 보고 간다 지금 여기가 전부다 새는 허공을 물고 나는 땅을 물고 간다 살구나무에 이는 바람은 지금, 살구꽃을 물었다 간다, 지금 내가 물고 가는 이 길은 봄을 다 물고 있는 자리, 물고 온 그 봄을 원기사 평상에 부려놓으니 땀난다, 이마 환하다 처지다 절 마당에 수양매실 환하다 휘휘 늘어졌다 어떤 가지들은 땅에 닿았다 꽃으로 잘 엮은 주렴 같다 봄바람에 마음을 다 내주었나 느릿느릿 마당을 쓸고 있다 이제는 처지는 것들이 좋다 솟구치는 것들의 진절머리, 힘 풀고 아래로 아래로만 나붓거리는 마음이여, 생각 없이 사는 유순한 마음이여, 늘어진 꽃가지 사이로 내 마음도 한 가지인양 척, 감겨든다 *불교와 문학 흥미 있는 시 2020.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