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추천 100

의자 / 이정록

주선화 2008. 3. 26. 10:10

의자 /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엔 꽈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2006년>

 

 

 

* 어른의 말씀을 받아 적기만 해도 시가 될 때가 많다

주름살 사이에서 나온 말씀이기 때문이다 짧고 두서없이 울퉁불퉁 볼거져 나온 말이지만

마늘처럼 매운 맛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어머니가 무심코 던지 말씀으로부터 태어났다

허리가 아픈 어머니는 앉아 쉴 곳이 눈에 밟혔던 것이다. 어디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허리를 펴고 싶었을 것이다

이 시가 심심찮은 것은 의자를 내놓을 데를 태연무심하게 열거하는 어머니의 품 큰 생각에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꽃과 열매와 참외밭과 호박과 망자에게도 의자를 내주어야 한다는 그 우주적인 마음 씀씀이에 있다. 공생과 배려에 기초한 이런 모성적 마음씨는 식구를 다 거둬가며 밥을 먹어온 연륜에서 생겨난 것이리라. (우리의 어머니가 아니면 누가 인생을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것이라고 먹줄을 대듯 명쾌하게 말할수 있겠는가)

 

이정록시에는 모자가 자주 등장한다

시 '꽃벼슬'에서는 한식날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를 모자가 찾아간다

아들은 무덤에 난 쥐구멍에다 꽃다발을 꽂아드린다. "꽃밥 한 그릇 바치는 것이다" 어머니는 쥐구멍에 술잔을 따르며 "새끄들이 술 갖고 올 줄 알고 /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있구나" 라고 익살맞게 말씀하신다

아들이 "무덤 안에서 뭔 소리 들려요"라고 너스레를 떨자 어머니는 농(弄)으로 "그랴 니 불알 많이 컸다고 그런다"라시며 "아예 술병을 쥐구멍에 박아놓는다" (모자 사이에 오가는 이 능청능청한 대화여)

 

"내 꿈 하나는 방방곡곡 문 닫은 방앗간을 헐값에 사들여서 술집을 내는 것" (좋은 술집)이라고 말하는 시인 (문태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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