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터
박윤우
들어온 골목이 나가는 골목을 찾느라 두리번 거린다
안 닿는 데를 긁으려고 억지로 팔을 꺾으면 거기, 공터를 견디는 공터가 있다
저녁은 공터의 전성기, 새떼들이 공중을 허물어 공터 한켠에 호두나무 새장을 만들고 있다
묵은 우유팩의 묵은 날짜 같은 상한 얼굴들이 꾸역꾸역 저녁을 엎지른다
헐거워진 몸을 네 발에 나눠 신은 개가 느릿느릿 공터를 가로지른다
과연 공터가 공터인 건, 한 번도 공터 밖으로 나가본 적 없어서다
공터에 왜 아이들이 없지? 그 많던 돌멩이들이 다 어디로 굴러간거야?
아무도 묻지 않는 그곳이라는 저녁, 빨래가 마르듯이 공터가 마르면서
침묵하는 서랍이다가, 무표정한 유리창이다가,
필사적으로 공터가 되려는 공터가 처음 보는 이의 등처럼 어둑어둑 저문다
서랍 정리
외짝으로 돌아다니는 양말은 쪽팔리니까 쪽팔리는 칸에, 큰 마음먹고 장만한 내 가죽 재킷과 낯간지러운 말은 자주 입으니까 손닿는데 챙긴다
오줌 멀리쏘기 시합을 하다 적신 민무늬 팬티, 저게 왜 여태 남았나. 감춰야 손해를 안보는 게 표정이니까, 표정 밑에 묻었다 혼자 꺼내 보고 혼자 웃어야겠다
너 키스해봤니? 한때는 갓 쪼갠 육송 장작 같은 입술이었다
영양가 없는 모임에서 만난 영양가 없는 여자 미자, 사는 꼴이 이게 뭐냐며 아침저녁으로 들이대는 저 입술은 늘 젖어 있으니까 베란다에 널어야겠다
횃대, 우물, 나뭇가지, 모래무지, ...선생님 입술을 쳐다보며 꾹꾹 눌러썼던 초등학교 일학년 때의 받아쓰기 공책은?
그처럼 신기하던 말들이 티백 같은 네 젖가슴처럼 납작해졌다. 웃겨 죽겠다를 우껴주께 따로 써도 하나도 우습지 않은 말들,
쌓인 말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서랍이 꽝 닫는다
네가 선물로 사다 준 폴란드 기병대의 찢어진 깃발과 내가 인사동에서 주워 온 새벽 수라군이 쳤다는 꿩과리채가 무슨 일 났냐며 두리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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