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원
ㅡ 김겸
끝없이 펼쳐진 눈밭이다
바람이 마른 모래처럼 일어난 눈가루를 휘몰아간다
저 막막한 눈밭에 단지斷指한 손가락으로
정방형의 칸을 내어 너를 쓰고 싶다
그 설원의 원고지에 무제無題라고 할
너의 순일한 마음에 대해 쓸까
영어囹圄에 갇힌 너의 죄 없는 욕망에 대해 쓸까
새하얀 너를 앞에 두고 토해냈던
내 먹물 같은 설움에 대해 쓸까
저 막막한 눈밭에 단지한 손가락으로
정방형의 칸을 내어 너를 쓰고 싶다
그 설원의 원고지에 깨어나지 못한 너의 침묵에 대해 쓸까
이 쇠잔한 생에 표착한 너의 불운에 대해 쓸까
외로워, 외로워 말하는 가오나시顔無隱 같이 끼니마다
밥을 보채는 너의 허기진 영혼에 대해 쓸까
정해진 과오를 범하고 정해진 책망을 듣는
너의 차갑게 굳어진 습習에 대해 쓸까
저 막막한 눈밭에 단지한 손가락으로
정벙형의 칸을 내어 너를 쓰고 싶다
하지만 내 가난한 가슴과 옹색한 문장으로는
너를 쓸 수 없다
너라는 이름의 눈밭은 오늘도 그만큼의
햇빛, 그만큼의 벌빛을 받아 홀로 아득하다
너의 눈밭에 그물 같은 붉은 칸을 내려 한
미옥한 나를 연해 뉘우친다
아무도 미워해 본 적 없는
아무도 시기해 본 적 없는
너라는 이름의 눈밭
저 깊고 아득한 너의 설원
'신춘문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포진 랩소디*/ 서동석 (2021년 신춘문예 뉴스N제주) (0) | 2021.01.29 |
---|---|
돌의 찬 손이 이마를 짚어주다 / 백향옥 (2021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0) | 2021.01.19 |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이 거울이 마음에 든다 / 남수우(202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0) | 2021.01.08 |
작명소가 없는 마을의 밤에 / 신이인(202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당선작) (0) | 2021.01.05 |
최초의 충돌 / 김민식 (202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0) | 2021.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