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상

2021년 시산맥 신인상 당선작

주선화 2021. 3. 18. 14:20

발치

 

ㅡ 손준호

 

 

뿌리가 비스듬히 깊네요

사랑니를 뽑고 당신 발치에 누워요

사랑이란 이름으로 반백을 동거하였으니

눅눅했던 시간의 흔적이 웅덩이처럼 파였어요

 

뿌리 뽑힌 곳엔 뿔이 나지요

땅이든 잇몸이든 퉁퉁 붓고 멍들 수 있어요

한술 뜨려면 두 시간은 솜 물고 있어야 해요

맘이 자꾸 쓰이고 혀가 저절로 가닿게 됩니다

 

난 자리는 그런 곳이죠

먼발치인가 싶어 돌아보면 없는,

지붕 위에 던져진 젖니는 누가 물고 갔을까요

콩닥콩닥, 가슴팍에 키우던 새는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슬픔은 어둠 속에서 뿌리째 번식합니다

발칫잠에서 등걸잠에서 새우잠으로

엄니로부터 엄니의 엄니로부터 유전하는 뿌리들

짐승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엄니라 부른대요

슬픔을 물고 늘어지려면 이빨 없인 안되죠

 

햇살 갉아먹던 후박나무 이파리를 봤어요

어금니로 허공을 깨물던 세이지 꽃잎을 봤어요

그러나 한겨울이면 송두리째 몽니를 거두고

뿌리 발치에 스스로 거름이 되는 용기를 봐봐요

 

마스크 끼고 실밥 풀러 가야겠어요

겸손의 뿌리가 얼마나 얕은지 벌써 캔맥주가 생각나요

당신 발치 누워 줄거리 뻔한 일일연속극을 보면서

병든 나의 텍스트가 차츰 호전되었으면 좋겠어요

서울 하늘은 또 함박눈을 뿌린다는 일기예보예요

 

 

 

에이다

 

 

칼을 쥔 바람의 이름

 

무엇을 떠올리듯 자유다 부신 금발의 북유럽 여인이나 열도 소녀의 애살 맞은 이름 같은, 떠오른 생각에 돌을 매달아도

자유다 들고양이가 세 발로 오후 세 시를 유유히 건너가고 있었다 외진 마음 몇 자락 슥슥슥 베고 가는,

 

여리박빙의 나날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당신에게 휩싸인 계절의 막후는 뼈저리게 앙상하였다 나무가 털리고 가계엔 금이 가고 간유리가 박살나서, 나는 강으로

달려가 살얼음이 되었다 등뼈에 성에꽃 새겨 넣듯 그믐이었나, 어디선가 쩍 손목을 긋는 얼음장 조각조각 찢어진 손바닥

돌멩이처럼 굳어가는 혀

 

어른과 어린, 같은 말을 꺼내서

착한 피라미와 버들치의 아가미에 던져주면서

풍선껌처럼 질겅질겅 슬픔을 오래 되씹는 습관

 

딱딱해진 과거를 깨물면 이유 없이 혀끝에서 피가 났지

월동이란 한철, 어딘가 심장을 대신 보관할 곳 없을까

 

누군가 번호판 없는 오토바이를 갈대 수풀에 버렸다

 

반지하 자취방 쪽창에 들이치던 소나기처럼

잊을 만하면 나를 두드리는 당신,

날아가는 칼을 쥔 바람의 이름

 

에이다,

 

 

 

햇살 요양사

 

 

  뭉그적뭉그적, 해종일 저러고 있다. 빛바랜 플라스틱 의자에 푸져 앉아 혼잣말을 무슨 알약처럼 복용하고 있다. 먼길

오느라 솔찬히 욕봤소, 합죽한 노파는 함부로 반말을 던지지는 않았다. 기력 잃은 대문은 입을 헤벌쭉하고 민무늬 불룩

담은 군데군데 관절이 나갔다. 빨래집게는 틀니로 헐겁게 바람을 물었고 툇마루를 수발 중인 섬돌은 등허리가 반질반질

했다. 해진 소매 끝단에 겨운 졸음 매달고 빈 들녘 볏단같이 모짝모짝 말라가는 노구.

 

  어디 좀 봐요, 햇반은 잘 데워 드시나요? 볕살 몇 장 꺼내 정수릴 쓰담쓰담하자 터앝머리 모과나무가 참새 떼 한 됫박

쏟아붓고 왁자해진 독거에 마당은 혈색이 확 도는데, 외려 먹구름처럼 그늘지는 안색, 문득 눈물길로 차올랐을 것이다.

손금을 툭 놓친 사람, 시큰시큰 쇳내 나는 이름. 종신보험같이 오래된 그림자만 몇 차례 뙤똥뙤똥 문지방을 들락거렸다.

늙은 나무라고 늙은 꽃을 피우는 건 아니잖아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해요. 저녁이면 손끝에 경련이 일어요. 쇠줄 묶

인 백구가 등 휘도록 텅텅 적막을 물어뜯고 있었다.

 

 

 

벚꽃뱅어

 

 

  황사는 웃었고 마스크는 울었다 꽃가루가 입술을 틀어막자 쿨럭, 창(窓)은 비염을 앓았다 구름의 등뼈가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직진해야 하는데 좌회전 차선에 들었다 칼날 뒤집으면 칼등에도 꽃은 핀다고 밀어서도 당겨서도 문은

열릴 수 있다고, 라디오 주파수에 쑥물빛 짱짱 꽂혔다 때아닌 우박이 네이버 속보에 쏟아졌고 둥굴둥굴 파문에 우산

처럼 접혔다 펴지는 마음, 무르팍 당겨 앉은 바람이 슬쩍 악수를 청하면 수당 받으러 온 실직자처럼 쭈뼛 보리이삭

패는 사월,

 

  가시나가 공부해서 뭐하노, 그 덕에 미싱을 빨리 돌렸고 내력만큼 답답한 산소마스크 낀 누이는 마침내 식물이 되

었다 녹색 심장을 가진 봄은 빚쟁이처럼 몇 번 더 찾아왔고 까무룩, 노모는 웃음이 무거워 자주 발등을 찧었다 절정

의 계절에 강으로 돌아와 알 낳고 죽는 벚꽃뱅어처럼 세상이 다 웃는 봄 같아도 누구나 울음 한 바가지 늑골 깊이 쟁

여두고 사는 것을, 목단 이불에 찬밥 쑤셔 넣던 기억의 아랫목에 보내지도 잡지도 못할, 누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