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일서정 (秋日抒情) /김광균
낙엽은 폴ㅡ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즈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가닥 꾸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우에 세로팡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ㅡ한 풀버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간다. <1947년>
* 김광균(1914 ~ 1993) 시인은 1930년대 후반 회화적 이미지즘의 새로운 문법을 선보였다
그의 시에 '회화(繪畵)'라는 웃옷을 입혔다 모더니즘 시론가 김기림은 "소리조차를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주를 가진 시인"이라고 평했다
김광균시는 독자들의 눈앞에 한 장 한 장의 데생을 그려 보이는 작법을 구사했다
그는 섬세한 감각의 촉수로 "구름은 / 보라빛 색지(色紙)우에 /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뎃상)로 표현했고, 흰 눈이 내리는 모습은 "먼 ㅡ 곳에 여인의 옷벗는 소리"(설야)로 표현했고 성교당의 종소리는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외인촌)로 빛나게 노래했다
1926년 12세의 나이로 '중외일보'에 처음 시를 발표하면서 천부적인 시안을 자랑했던 김광균시인은
195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동안 시를 쓰지 않았다
그는 안개 자욱한 한국시단에 장명등 하나를 켜 놓았다
아직도 그곳서 가늘고 고단한 불빛이 새어나오며 밤을 밝히고 있다 (문태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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