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살부림

주선화 2008. 9. 30. 12:52

2008 3차분 2/4분기 문예지 게재 우수작품

 

 

 

살부림/김륭

 

 

 

  그대를 사랑한 후 알았다 단말마의 고통을 위해 필요한 건 칼이 아니라

  꽃이다, 칼보다 먼 곳에 살던 꽃이 쓰윽 걸어들어 오면서

  내게도 급소가 생겼다

 

  모든 칼은 한때 꽃이었다 바람의 발바닥을 도려내던 머리맡에서 피보다 진한 눈물을 도굴했다 나는, 그대 몸 가장 깊숙한 곳에서 방금 태어났거나 이미 죽어버린 구름이다

 

  해바라기 꽃대에 목을 꿴 그대 눈빛을 보고 알았다 바람에 등을 기댈 수 없는 꽃은 칼이 된다 악연이다 우리의 사랑은 구름 속에 꽂혀있던 나를 뽑아 나무의 허리를 베고

  새의 날개를 토막-치면서 시작된 것이다

 

  칼로 물 베기란 붉은 살을 가진 물고기비늘에 필사된 천지검법의 하나,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상대를 바닥에 눕히는 필살기 죽어도 사랑한다는 독침이 꽂혀있는

  애무의 마지막 초식이다

 

  변태가 불가능한 체위다 지상의 모든 사랑은 꽃의 신경조직과 무당벌레의 눈을 가졌다 늘 손잡이 없는 칼을 품고 다니며 축지법에 능통한 법 훌쩍, 한손의 고등어처럼

  그대와 내가 다녀온 하룻밤의 별을 식히는 동안 절정을 맞는 것이다

 

  피바람 몰아치는 무림천국을 흥미진진한 동물의 세계로 잘못 알고 뛰어든 멧돼지나 노루가 검은 아스팔트 바닥에 꽃을 피워 올리듯

 

  목 잘린 태양이 태아처럼 뒹구는 21세기 칼끝에 맺힌 핏방울처럼 흘러내리는 발가락과 천둥번개를 먹고 자라는 머리칼 사이로 우리는 오늘도 어제나 내일처럼

  식상하게 태어나거나 새롭게 죽어갈 것이다

 

  그대 잠시 한눈파는 사이 급소가 사라졌다 한번 더 목숨을 버릴 때가 온 것이다 적의 급소가 곧 나의 급소다, 장미 한 다발 하나 사들고

  칼 받으러 간다

 

 

<미네르바 2008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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