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사방에 찔레꽃 / 이기영
천지사방에 찔레꽃이 첫눈 오듯 내려앉을 때면 어머니는
나를 꽃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언제나 그렇듯 나자
막하고 느릿한 목소리로 - 찔레꽃 아래에는 화사(花蛇
)가 살아야 - 은밀하고도 조심스럽게 천기라도 누설하는
사람처럼 말하던 어머니는 꽃뱀이 왜 유독 찔레꽃 아래
에서 봄을 나는지 다 알고 있다는 음성으로 말할 때 나는
온 몸이 까닭 모르게 오스스 떨려와 동백꽃같이 화사하
게 물들인 뱀이 , 그 화상이, 순정한 찔레꽃 아래에서
꼼짝도 않고 빨간 혀를 날름거리며 찔레 그 아슴아슴한
꽃향기를 할짝거리면서 한입씩 베어 먹으면서 찔레향이
제 등에서 미끄러지는 걸 긴 꼬리를 밟고 저 멀리 달아
나는 걸 내가 눈길도 안 주고 스쳐지나갈 때까지 꽃사태
속에서 훔쳐보면서 그 눈부신 꽃 이파리들을, 순정한 오
월을, 선득하니 불경한 꽃뱀이 저 혼자 다 차지해버리고
내게는 황금심장을 가진 꽃의 허물만 남겨준 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