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지도에 목욕탕이 없다 / 박지웅

주선화 2017. 3. 9. 17:17

지도에 목욕탕이 없다 / 박지웅



그는 남의 육체에 가게를 차린다

침대에 끌어들여 물의 점포를 연다 평면의 가게다


옷을 벗어야 문을 열 수 있는 궁벽의 매장

처음 몸을 받을 때는 서글폈다

손님이 누우면 때밀이는 평면의 세계로 추락한다

밀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미는 것이다

몸보다 욱신거리는 것은 낙심이다


빈손을 몸에 익히려면 아직 멀었다


갈빗대들은 일종의 누워있는 가로수다

그곳에 손을 때면 평면의 나무가 흔들리고

숨어 있던 붉은 새가 바스락거린다

새는 사랑할 때만 다른 심장으로 자리를 옮겨 앉는다

그때 새의 길을 따라 무지개가 자란다


몸을 훔치다 보면 속살이 만져진다

거기에 무너진 무지개의 잔해가 자주 발견된다

납작하게 버려진 유방들과 함께


손뼉을 두 번 치면 손님은 몸을 뒤척인다

잠깐 흔들리던 살결이 멈추면

척추를 따라 긴 무풍지대가 생긴다

그 평평한 바다를 걸어 지나는 고래 가족을 본 적이 있다

유목민의 등에 붙은 물줄기는 한 방울도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쯤 끝났을까 깃들 곳을 찾았을까

얇고 느린 여행은


침대에 무동력선처럼 떠 있는 몸뚱이는 서글프다

따뜻한 물을 붓는다 관계가 깊어지는 순간이다

손님이 일어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모두 입체로 돌아온다


젖은 침대를 닦고 가게 문을 닫는다

그는 물기 꼭 짜낸 빈손을 장자 위에 넌다

앞으로 뒤로 체위를 즐기던 삶은

도무지 발기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 모든 평면의 형식은 거기서 비롯되었다


그는 불을 끈다

신기루처럼 라일락이 필 때 목욕탕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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