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 / 김행숙

주선화 2017. 12. 6. 16:37

우리가 볼 수 있는 것

                                                 김행숙




하염없이 승강장 벤치에 앉아 있다. 스크린도어에 비친 내 얼굴이 터널 속에서 어른거렸다.

떠나지 못하고 같은 곳을 맴도는 지하철의 유령들과 섞여 있었다.


밖에서 당신을 봤어. 어젯밤 남편이 말했다. 제발 아무 데서나 불행한 여자처럼 넋 놓고 앉아

있지 마. 그는 수치심을 느낀 것처럼 보였다.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승강장 안으로 열차가 들어오고 있으니 승객 여러분께서는 노란 안

전선 밖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물러섰으면 좋겠다. 내가 당신을 조금 더 모르고. 당신이 나를 조금 더 모르면. 우리

어쩌면 조금 더 좋은 사이일지도


정전이 돼도 지하철은 환하다. 한낮의 수면내시경 검사처럼 열차가 유령들을 관통했을까. 안

개가 걷히는 하늘처럼 유령들이 열차를 통과했을까. 스크린도어에는 피 한 방울 튀지 않았다.

스크린도어가 열린다.


나는 내가 볼 수 있는 것을 본다. 열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앞면과 열차에 올라타는 사람들

의 뒷면. 나는 내가 볼 수 없는 것을 보지 않는다. 열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뒷면과 열차에

올라타는 사람들의 앞면.


그리고 나는 당신을 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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