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초조(初造)한 코 / 허은희

주선화 2017. 12. 19. 12:06

초조(初造 )한 코

                                   허은희


  정확히 말하면 거지 깡통의 그림자였어요. 깡통이 흔들릴 때마다

툭툭 그늘이 쏟아졌어요. 바닥에 떨어진 그늘을 잘 뜯어내면 옷 한 벌

은 나온대요.입성이 좋아야 잘 빌어먹는 거라고. 두목이 늘 옷발을 강

조하는 걸 들었거든요. 언제부턴가 그들은 입에 밥을 넣는 것보다 옷

가지 세는 일에 몰두했죠. 소쿠리에 담아 둔 찬밥을 걷어오는 사람

은 하수. 빨랫줄에 널린 옷을 걷어 오는 사람은 고수. 물론, 고수는 옷

을 튜닝해서 입어요. 들키면 이 골목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쯤은

알거든요. 한 번은 옷 주인이 의심의 눈길을 보냈지만. 그도 함부로 확

정할 수는 없었죠. 섣불리 발설하면 시기 질투 모함꾼으로 몰릴 수 있

으니까. 떨고 있는 건 오히려 옷 주인이었어요. 그때부터 이상한 일들

이 벌어졌어요. 사람들은 훔친 옷에 덧입힌 조각 천에만 코를 박기 시

작했어요. 전범을 모사하려는 듯 떼거리로 바늘을 들고 몰려들었어요.

사람들이 하루 사이에 장님이라도 된걸까.누구나 몸피만큼의 그늘을

갖고 있다는 걸 나도 아는데. 그 옷은 거지 깜통의 그늘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데. 그늘의 평수를 세탁하려는 사람들이 바늘만

갈아요. 제 코가 꿰인 줄도 모르고. 체인 스티치. 노트 스티치. 코럴 스

티치. 주워들은 모양을 흉내내느라 손가락을 찌르면서.




포장지를 아낍시다



  열쇠고리 하나에 수십 겹의 종이를 두른 덩치만 큰 상자처럼. 밀밥

가득한 귓속말. 비밀이야. 귀를 잡아당기는 입술을 나는 읽지 못해.

차라리 손짓 발짓을 하지 그러니. 입보다 눈을 맞추는게 좋은데. 내

눈이 귀보다 주파수가 더 밝거든. 상자를 다 풀기도 전에. 입술을 매

일매일 배달되고. 들리지 않는 암호를 헤치며. 근거없는 짐작들만 날

아들어. 귓속이 짐짝들로 꽉 찬 창고야.


  복선이 비만해지면 영화는, 바닥없는 구덩이로 추락하고. 관객들

은 '안 본 눈 찾습니다' 중얼거리며 팝콘을 집어던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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