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ㅡ 최문자
파랗게 쓰지 못해도 나는 늘 안녕하다
안녕 직전까지 달콤하게 여전히 눈과 귀가 돋아나고 누군가를 오래오래 사랑한
시인으로 안녕하다
이것 저것 다 지나간 재투성이 언어도 안녕하다
삼각지에서 6호선 갈아타고 고대병원 가는 길
옆자리 청년은 보르헤스의 「모래의 책」을 읽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청년이 파랗게 보였다
연두넝쿨처럼 훌쩍 웃자란 청춘
우린 나란히 앉았지만 피아노 하얀 건반 두 옥타브나 건너 뛴다
난삽한 청춘의 형식이 싸락눈처럼 펄럭이며 나를 지나가는 중이다
안녕 속은 하얗다
난 가만히 있는데
여기 저기 정신 없이 늘어가는 재의 흔적
아무도 엿보지 않는데서
설마, 하던 청춘이 일어나서 그냥 나가버렸다
청춘이 아니면 말 없는 짐승처럼 고요하다
고대 앞에서 내릴 때
새파란 보르헤스 청년이
하얀색으로 흔들리는 내 등을 보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드러운 시간을 어느 곳에 쓰면 좋을까 / 이성배 (0) | 2021.05.11 |
---|---|
곁 / 성선경 (0) | 2021.05.09 |
강 / 김성규 (0) | 2021.05.04 |
와온 바다 / 곽재구 (0) | 2021.04.28 |
들풀 / 홍사성 (0) | 2021.0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