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연못의 독서 / 길상호

주선화 2021. 6. 14. 10:58

연못의 독서

 

ㅡ 길상호

 

 

그날도 날아든 낙엽을 펼쳐들고

 

연못은 독서에 빠져 있었다

 

잎맥 사이 남은 색색의 말들을 녹여

 

깨끗이 읽어내는 것이야말로

 

초겨울 가장 서둘러야 할 작업이라는 듯

 

한시도 다른 데 눈을 돌리지 않았다

 

침묵만 남아 무거워진 낙엽을

 

한 장씩 진흙 바닥에 가라앉히면서

 

물살은 중얼중얼 페이지를 넘겼다

 

물속에는 이미 검은 표지로 덮어놓은

 

책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연못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오래 그 옆을 지키고 앉아 있어도

 

이야기의 맥락은 짚어낼 수 없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나는 그림자를 뜯어

 

수면 아래 가만 내려놓고서

 

비밀처럼 깊어진 연못을 빠져나왔다

 

그날 읽은 것도 없는 나를 넘기다 말다

 

바람이 조금 더 사나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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