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봄밤, 냄비에 돌을 끓여 먹었다 /권현형

주선화 2021. 10. 4. 12:54

봄밤, 냄비에 돌을 끓여 먹었다

ㅡ 돌과 라일락과 관제엽서

 

ㅡ 권현형

 

 

꽃을 보면 신을 믿게 된다

아름답고 아슬아슬한 저 미궁을

누가 무슨 수로 발명할 수 있을까

 

라일락을 만나면 숨을 멈추고 꼭 들여다본다

몸 어딘가 욱신거리는데도 한 발짝 다가가

연보라 커튼 안쪽 과거를 기어코 들춰보게 된다

세 들어 살던 그 집 마당에 두 그루 라일락이 서 있다

 

내 것이 아니었던 흰색과 보라색

공기의 항연은 가난한 봄의 절정이자 파국이었음을,

비가 오면 짙은 향기 때문에 더 허기가 졌다

 

꽃은 엽서였고

벼랑이었고 자존심이었다

나 대신 끝없이 말을 걸어주었다

이유 없이 사랑할 사람이 필요했던 사춘기 무렵부터

 

여즉, 봄밤마다 날개도 없이 시베리아에서 아프리카까지

따뜻한 돌을 찾아 날아간다

냄비에 차가운 돌을 넣고 끓여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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