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허밍은 거침없이 / 이병철

주선화 2021. 11. 23. 10:31

허밍은 거침없이

 

ㅡ이병철

 

 

잉어는 평화롭게 헤엄치지만

물을 벗어날 수 없고

물은 거침없이 흐르지만

보를 넘어갈 수 없네

 

물을 벗을 수 없는 잉어의 자유와

보를 넘을 수 없는 물의 질주는

악보 안에서 평생을 사는 바이올린처럼

아름답고 성실한 반복을 연습하는 중

 

잉어는 평화롭고 물은 거침없고

바이올린은 느릿느릿 헤엄치다 격렬히 달려가고

나는 그 반복 속을 걷다가

새로운 해석에 또 실패한다

 

물을 벗어날 수 없는 잉어가 머릿속으로 헤엄쳐 오고

보를 넘을 수 없는 물이 오후의 감정을 파랗게 적시고

악보 밖으로 나온 바이올린이 내 허밍을 연주해도

불가능한 것은 다 생각 안에만 있네

생각이라는 단어를 사랑으로 바꿀 수도 있겠지만

 

잉어와 물은 음악처럼 흐르고

강이 얼면 흐르는 것에서 음악이 분리되고

멈춰버린 반복은 또 다른 반복으로 흐른다는 내 생각이

비로소 풍경이라는 불가능을 자유롭게 풀어놓을 때

나는 천변에 살지 않으면서

천변을 벗어날 수 없는 귀신이 되었네

 

이제 생각은 평화롭고 허밍은 거침없고

바이올린은 같은 곡을 연주하지만

다르게 듣는 귀가 생겼다 얼음이 녹아

물이 흐르고 잉어가 헤엄치는 천변을 걷는다

 

해석이 막 시작되었다

해석이라는 단어를 사랑으로 바꿔도 좋다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겨울에 피는 것들 / 김효운  (0) 2021.11.29
재봉틀과 오븐 / 박연준  (0) 2021.11.24
안데스 콘도르 / 서연우  (0) 2021.11.19
초행 / 김희업  (0) 2021.11.18
폐사지 연못 / 손 음  (0) 2021.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