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노을이 되는 그늘처럼 / 이진환

주선화 2022. 11. 2. 09:52

노을이 되는 그늘처럼

 

-이진환

 

 

어스름을 벗는 새벽의 그늘엔 웃음을 말린 헛기침이 있어

고요가 몸을 풀고 잎사귀 맑아지는 소리다

 

비행을 준비하는 새들의 소란만큼이나 짧은 아침에

그늘의 귀퉁이가 닳아도

해 질 녘, 저들의 날갯짓이 힘들라 치면 뒷짐 지던 자신을 몹시 흔들지 않더냐

 

흘린 땀에 길들여져 묵직해진 발소리에

무심한 듯 눈짓 주다가도 가운데 자리 내어주고

시큼해진 속이라서 한 사발막걸리로 얼큰한 팔베개에 두 눈을 감아보는

 

그런 거다

가려운 등을 긁어가며 뒤트는 몸짓을 하다 보면 바람이 되는 거다

한 소절씩 노랫말을 반복하다 보면 이 시절이 그 시절이 되는 거다

 

길 건너간 이에게 안부는 한 번 더 보고 싶어서고

건너오는 이에게 안부는 한 번 더 불러보고 싶어서다

 

오가던 허전함에 익숙해진 손을 펴보면서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걸음을 생각해보지만 저도 모르게 나무 그늘에 앉아서는

 

눈 속 깊숙이 말라붙은 허물에 마른침 삼키다가

등뼈 위로 얹히던 눈시울처럼

 

귀밑 들치는 찬기를 움켜쥐고 노을 잠에 들기도 하지 않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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