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독할 수 없는 편지다
-조은설
나는 아무도 읽지 못한 한 통의 편지다
그러나
그대가 나를 읽지 못한다는 건 견딜 수 없는 통증
판독할 수 없는
고대의 상형문자와 기호들이 문신처럼 뒤덮인
내 영온과 육
그대는 읽어낼 줄 알았는데
나는 소행성의 어린 여자
새벽 미명에 은하계를 건너오다 그만
그대의 자장에 부딪혀 추락하고 말았지
하염없이 목마른 시간들을 갈아 마시며
몇억 광년이나
광활한 우주를 떠돌았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조금이라도 더
그대를 견디는 것뿐
더는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벼랑에서
기다림의 낡은 끈을 놓아버렸다
나는 그대가 해독할 수 없는 슬픈 편지
한 문장씩 지워내도
내 안의 그대는 고스란히 남아
나를 읽어주기를
안간힘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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