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 16

아키비스트 / 조온윤

아카비스트 -조온윤 두드리는 사람은 없었지만문을 열었어누군가 문틈에 끼워둔 햇빛이발밑으로 툭 떨어졌지 쪽지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네너무 오래 닫혀 있던 시간에 비해아무것도 밀고하지 않겠다는 듯이 굴러갈 용기가 없어 멈춰 있는 공처럼웅크려 있던 밤에 대해서는 오로지나의 기록에 맡기겠다는 듯이 나는 그 시간을 동면이라고도 적어보고반성이라고도 적어보았지무엇에 대해라고 묻는다면너무 오래 가두었던 그림자에 대해 혼자서만 알고 있던 병명에 대해처음으로 비망을 하듯낯모를 미래에게 편지하면서 낯모를 미래의 손뼉이어깨에 포개지는 듯한 온기에 놀라조용한 실내를 돌아보면서 두드리는 사람은 없었지만 문을 열었어실례한다는 말도 없이열린 문 사이로 들어와몸을 뉘고 있는 빛이 있었지 그것을 주워 펼쳐볼 수 있다면단 한 번도..

새의 이름 / 박소란

새의 이름 -박소란 머리맡에 한 점 빛이 걸려 있다자다 깬 자리에벽을 곧추세우는 맑은 얼룩 어디서 나타난 빛인가새인가날다 날다 문득 여기까지 왔구나 낡은 스탠드처럼 척추가 굽은 새그 새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나의 새, 라고 해도 될지 배운 적 없는 이름을 기억해 내려 오늘은 조금 걸어야겠다마트에 가서 과일을 고르고 저녁에는 새 밥을 지어야겠다쌀을 씻을 때 흐르는 보얀 물을 손으로 가뜩이 떠서 마셔도 보고 나아야겠다 한 마리 새를 얻어 벽에 걸어 두었으니날개를 보기 좋게 손질해 못을 박아 두었으니 이슥한 밤에도 사라지지 않도록 새야, 새야, 부르면비명처럼 찬란한 피를 쏟고 으스러진 날갯죽지를 푸드덕거리고 벽 가득 번져 흐르는 글씨유심히 들여다보면아직 남은 약간의 아침, 부신 눈을 비비다 보면 창, 하고 ..

나 자신을 기리는 노래 / 김소연

나 자신을 기리는 노래 -김소연 입술을 조금만 쓰면서내 이름을 부르고 나니오른손 바닥이 심장에 얹히고나는 조용해진다 좁은 목구멍을 통과하려는물줄기의 광폭함에 가슴이 뻐근할 뿐이다 슬프거나 노여울 때에눈물로 나를 세례(洗禮)하곤 했다자동우산을 펼쳐든 의연한 사내 하나가내 처마 밑에 서 있곤 했다 이제는이유가 없을 때에야 눈물이 흐른다 설거지통 앞하얀 타일 위에다밥그릇에 고인 물을 찍어시 한 줄을 적어본다네모진 타일 속에는그 어떤 암초에도 닿지 않고 먼 길을 항해 하다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그의 방주가 있다 눈물로 바다를 이루어누군가의 방주를 띄울 수 있도록 하는 자에게는복이 있나니, 복이 있나니평생토록 새겨왔던 비문(碑文)에습한 심장을 대고 가만히 탁본을 뜨는자에게는

밤엔 명작을 쓰지 / 김이듬

밤엔 명작을 쓰지(외 1편) -김이듬 극장에서 돌아와 글을 써요 나는 지저분하며 조그마한 구역에살아요 항상 떠날 궁리를 하죠 안정감이 밤물결 소리를 내면떠나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요 나를 여기 데려다 놓고 오지 않는사람이 혹시나 들를지도 몰라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곤 합니다 방 모서리엔 낡은 회색 슬리핑백이 있어요 오늘은 자지 않고명작을 써요 반투명한 해파리처럼 생긴 전등을 켜요 미안하지만 당신을 위로하러 글을 쓰진 않아요 이어링을 만지작거리며명작을 써요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 은밀하고 거칠며쓰라린 글쓰기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죠 그렇습니다 맞은편 복도로 햇살이 파도처럼 밀려오죠 나는 밤새 책상을 부여잡고 표류한 셈이죠 그게 제 역할 같아요 나는어떤 게 명작인 줄 몰라요 맥베스 세트장에서 내게 말..

판교 / 허연

판교 -허연 거의 모든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아버지가삼십 퍼센트 남았다는 심폐기능을 다 바쳐성당 마당을 쓸고 있었다 "차라리 안 들리니까 더 좋아. 성령 말씀만 들으면 되지" 그렇게 남의 말 안 들으시더니뜻대로 된 것이다 먼발치에 차를 세워 놓고빗자루질 하는 아버지를 봤다 빗자루보다 더 말라버린 아버지가시성(諡聖)되지 못한동판교의 성자로 보였다 참은 인忍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고나를 가르쳤던 아버지는정작 본인은 참지 않으셨다 풍화와 연정, 불운이런 것들이 아버지의 구십 성상을 할퀴었고이제 그는 갑자기 성자가 되어 있다 그의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그가 취해서 불렸던 노래들은 다 어디로 가서부질없는 삶과 죽음의 지층으로 들어갔을까 그대가 죽고 내가 살아서 그 노래들을 부를까 아버지는 나보고왜 젓가락처럼..

라면을 끓이다 / 이재무

라면을 끓이다 -이재무 늦은 밤 투덜대는, 집요한 허기를 달래기 위해신경 가파른 아내의 눈치를 피해주방에 간다 입 다문 사기 그릇들그러나 놈들의 침묵을 믿어서는 안 된다 자극보다 반응이 휠씬 더 큰 놈들이다물을 끓인다 비정규직 노동자처럼 실업을사는 날이 더 많은 헌 냄비는 자부가 가득한표정이다 물 끓는 소리가 요란하다한여름밤의 개구리 소리 같다모든 고요 속에는 저렇듯 호들갑스런 소음이숨어 있다 어제 들른 숲 속 직립의 시간을 사는침묵 수행의 나무들도 기실은 제 안에저도 모르는 소리를 감추고 있을 것이다찬장에서 라면 한 봉지를 꺼낸다라면의 표정은 딱딱하고 각이 져 있다그들이 짠 스크럼의 대오는 아주 견고하고단단해 보인다 그러나 끓는 물 속에서 그들은 금세 표정을 바꿔각자 따로 놀며 흐물흐물 녹아 내릴 것..

꽃의 속도 / 성영희

꽃의 속도 -성영희 불의 속도가 빠르다모닥불에서 옮겨간 검은 발화를 본다한 번 터지면 세상모르고 부푸는 꽃그보다 빠르고 붉은 꽃은 없어서 사람들은 가끔 놀이의 불꽃들을 쏘아 올리기도 한다허공에서 발화하는 불꽃은 허공에서 사라지지만땅에서 옮겨간 불씨는 걷잡을 수 없는 땅의 화염이 된다첩첩산중도 빌딩 숲도거대한 잿더미로 만들고 마는 엄청난 식욕 속에는보이지 않는 하찮은 방심이 있을 뿐이다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번지는 불길에는파멸의 소리음이 외마디로 솟구쳐 오르기도 한다 가랑잎처럼 바스락거리거나잘 마른 장작처럼 토막 난 것도 아닌데그 어떤 걸음보다 빠르게 번지는 방심활활 타오르는 저것은 놓쳐버린 순간이다보이지 않는 검은 속내에는번지는 앞을 맹렬하게 쫓아가는 뒤가 있다반드시 앞을 막아서지 않으면 막을 수 없는 ..

비탈에 기대다 / 박설희

비탈에 기대다(외 1편) -박설희 최루탄 난무하는 교정, 굶주린 배한 치 앞도 안 보이던 스물한 살몸은 뜨거웠으나 세상을 떠나고 싶었던 마음지리산 종주길에 나섰다 그래도 나눌 수 있는 게 있어 다행이라고말라가는 풀에, 갓 피어나는 꽃에, 시든 나무뿌리에핏방울을 뚝 뚝 흘리며 걸었다빈혈을 앓는 내 삶에수혈하듯이 연하천 벽소령 장터목·····몇 송이 꽃 피웠을까풀 한두 포기 튼실히 뿌리내렸을까 천지만물이 동기간물보다 진한 피를 나누었으니잘 견디고 살아남자는 약속 안개 속에서 길을 잃으며, 잃기를 원하며어둠 속에서 네발로 기며길과 길 아닌 걸 구별하며 피를 나누었다,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보였을 때촉수를 뻗어보듯이피의 길을 늘여갔다 길은 계속 비탈이었고비탈이어서, 비틀거리고 넘어지려는나를 받아주었다이..

움직이지 않고 달아나기 멈추지 않고 그 자리에 있기 / 임유영

움직이지 않고 달아나기 멈추지 않고 그 자리에 있기 -임유영 시험이 끝나고 너와 같이 걸었다옛날처럼 손잡고 다정하게여기서 만날 줄은 정말 몰랐네 그렇지개구리 군복을 입은 넌 중앙도서관에서 내려왔고나는 종로 어디 구석진 찻집에서대추차랑 약과를 먹고 있었는데통유리창 밖에서 네가손 번쩍 들고 인사했지우리 그때 눈이 마주쳐서 웃었지네 코에 걸쳐진 잠자리 안경 밑에(넌 가끔 안경을 껶지)하얀색 마스크 속에(너도 요즘 마스크를 쓰고 있겠지)너의 입술이 천천히 산책을 했지 아무래도쫓기는 마음으로이제 곧 경찰이 들이닥치고나의 친구들은 모두 맞아서 다칠 텐데하지만 내가 대오를 벗어나는 선택을 한번 해본 것인데경멸 없이 너를 만나보고대추차도 먹어보고허름한 찻집에도 들어가보고불친절한 주인 남자에게 화내지도 않고담배 피우지..

카테고리 없음 2025.05.16

불행한 일 / 박소란

불행한 일 -박소란 불행을 응원한다 불행의 편에서더 더 더 불행해져라 입술을 잘끈 깨물면서,하마터면 진짜로 그럴 뻔한다 무너진 빌딩 뒤집힌 자동차 우연처럼 불탄 사람들우연처럼타다 만 사람들, 아침이면불행은 어쩔 줄 몰라하며 구형 TV 앞에 엉거주춤 서서폴리스라인이 함부로 뒤엉킨 뉴스를 보는데 그 침울하고 핏기 없는 얼굴은 도무지 남 같지가 않고 간밤 나는 병들어 뒤척이는 한 사람 곁에 누워가늘고 불규칙한 숨소리를 오래 들었다소리가 거의 완전히 잦아들 때까지 그만, 이제 그만,기도하는 블행의 뒷모습을 몰래 지켜보았다집 안에는 언제나 냉기가 감돌고불행은 불행답게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웃고 싶지 않아읽다 만 책이 수북한 책상에 엎드려 대체로 혼자 지내지만때가 되면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출근을 한다 일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