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 나아가는
-하기정
나는, 물 같은 시를 쓰고 있는가, 물속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가,
여름을 이루는 단단한 순간들을 나열하는 사람인가, 서열을 가
르는 사람인가, 늪에 빠진 왼발을 위해 기꺼이 오른발마저 빠지
는가, 아름다운 것을 가리킬 줄 아는 여섯 번째 손가락이 있는가,
그것을 새길 수 있는 뾰족함을 가지고 있는가, 모서리를 밟는 발
가락이 있는가, 문워크를 할 줄 아는가, 한 발 나갔다가 두 발 물
러서는 사람이 있는가, 터진 주머니 속에서 굴러나온 동전을 줍
기 위해 자세를 낮추는가, 굴러가서 도착할 곳이 있는가, 꿈에 꽃
을 보는가, 사과를 깎으면서 뼈를 깎을 수 있는가, 무를 자르면서
두부를 생각하는가, 끌고 가는 꼬리를 자를 수 있는가, 궁핍을 위
한 궁리를 하는가, 불에 그을린 냄비처럼 생활이 묻어 있는가, 뒤
집힌 양말처럼 다시 뒤집을 혁명이 있는가, 나는, 시를 쓰면서, 귀
와 눈과 코와 입술이 뚜렷한 입체적 사랑과 구체적 결말을 애견하
는가, 이 모든 눈송이를 뭉쳐 질문처럼 던질 수 있는가,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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