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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비스트 / 조온윤

아카비스트 -조온윤 두드리는 사람은 없었지만문을 열었어누군가 문틈에 끼워둔 햇빛이발밑으로 툭 떨어졌지 쪽지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네너무 오래 닫혀 있던 시간에 비해아무것도 밀고하지 않겠다는 듯이 굴러갈 용기가 없어 멈춰 있는 공처럼웅크려 있던 밤에 대해서는 오로지나의 기록에 맡기겠다는 듯이 나는 그 시간을 동면이라고도 적어보고반성이라고도 적어보았지무엇에 대해라고 묻는다면너무 오래 가두었던 그림자에 대해 혼자서만 알고 있던 병명에 대해처음으로 비망을 하듯낯모를 미래에게 편지하면서 낯모를 미래의 손뼉이어깨에 포개지는 듯한 온기에 놀라조용한 실내를 돌아보면서 두드리는 사람은 없었지만 문을 열었어실례한다는 말도 없이열린 문 사이로 들어와몸을 뉘고 있는 빛이 있었지 그것을 주워 펼쳐볼 수 있다면단 한 번도..

새의 이름 / 박소란

새의 이름 -박소란 머리맡에 한 점 빛이 걸려 있다자다 깬 자리에벽을 곧추세우는 맑은 얼룩 어디서 나타난 빛인가새인가날다 날다 문득 여기까지 왔구나 낡은 스탠드처럼 척추가 굽은 새그 새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나의 새, 라고 해도 될지 배운 적 없는 이름을 기억해 내려 오늘은 조금 걸어야겠다마트에 가서 과일을 고르고 저녁에는 새 밥을 지어야겠다쌀을 씻을 때 흐르는 보얀 물을 손으로 가뜩이 떠서 마셔도 보고 나아야겠다 한 마리 새를 얻어 벽에 걸어 두었으니날개를 보기 좋게 손질해 못을 박아 두었으니 이슥한 밤에도 사라지지 않도록 새야, 새야, 부르면비명처럼 찬란한 피를 쏟고 으스러진 날갯죽지를 푸드덕거리고 벽 가득 번져 흐르는 글씨유심히 들여다보면아직 남은 약간의 아침, 부신 눈을 비비다 보면 창, 하고 ..

나 자신을 기리는 노래 / 김소연

나 자신을 기리는 노래 -김소연 입술을 조금만 쓰면서내 이름을 부르고 나니오른손 바닥이 심장에 얹히고나는 조용해진다 좁은 목구멍을 통과하려는물줄기의 광폭함에 가슴이 뻐근할 뿐이다 슬프거나 노여울 때에눈물로 나를 세례(洗禮)하곤 했다자동우산을 펼쳐든 의연한 사내 하나가내 처마 밑에 서 있곤 했다 이제는이유가 없을 때에야 눈물이 흐른다 설거지통 앞하얀 타일 위에다밥그릇에 고인 물을 찍어시 한 줄을 적어본다네모진 타일 속에는그 어떤 암초에도 닿지 않고 먼 길을 항해 하다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그의 방주가 있다 눈물로 바다를 이루어누군가의 방주를 띄울 수 있도록 하는 자에게는복이 있나니, 복이 있나니평생토록 새겨왔던 비문(碑文)에습한 심장을 대고 가만히 탁본을 뜨는자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