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손바닥 / 나희덕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槍창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 떨어진 밥알을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 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을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 2004년 >
* 이별이 이별의 사건으로만 완성된다면 사람에겐 애초부터 마음이라는 게
없었을 것이다
이별 뒤에 오는 촉촉한 망각의 시간이 훨씬 고통스럽다
무안의 회산 백련지를 찾아가 본 사람들이 많을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연꽃이 만개한 그 시간을 찾아가겠지만 시인은
연못이 폐선처럼 가라앉는 시간에 거기를 찾아간 모양이다
흰 연꽃도, 푸른 손바닥 같은 연잎도, 따뜻한 한 공기의 밥 같은 연밥도 없는
시간, 시인은 뒤늦게 그 연못을 찾아간 모양이다
그 연못에서 시인은 연밥과 연잎과 연꽃의 시간을 다시 살려낸다
우리의 습관인 순차적인 짐작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희덕시인은 "울음의 감별사" 이다
한 산문에서 붉은 석류가 마르면서 바람 빠진 공처럼 물렁물렁해지고 거기서
작은 벌레들이 기어나오는 것을 보면서 " 삶이란 완벽한 진공포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오히려 안도했다"라고 적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을 펼춰놓는 복숭아 나무
복숭아 나무가 그토록 눈이 부신 나무임을 처음 알게 해준, 복숭아나무와 친족인 시인. (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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