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추천 100

소 / 김기택

주선화 2008. 2. 12. 16:19

소 / 김기택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웅큼씩 뽑혀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2005년>

 

 

* 쟁기와 써레와 달구지를 끌던 소, 두꺼운 혀로 억센풀을 감아 뜯던 소,

송아지를 낳아 대학공부 시켜주던 소, 추운 날 아버지가 덕석을 입혀주던 소,

등을 긁어주면 한없이 유순해지던 소, 코뚜레가 꿰어있는 소, 우시장에 팔려가는 아침에는 주먹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 소......

 

김기택시인의 시는 무섭도록 정밀한 관찰과 투시를 자랑한다

그는 대상을 냉정하고도 빠끔히 묘사한다

그는 하등동물의 도태된 본능을 그려내거나 사람의 망가진, 불구의 육체를

고집스럽게 그려냄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생명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던

생명의 "원시림"을 복원시켜 놓는다 (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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