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유 시인
1973년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2006년 『시와반시』를 통해 등단했다.
액션페인팅 / 김지유
렌탈의 조건 / 김지유
엘리베이터 / 김지유
좌욕 / 김지유
등 / 김지유
액션페인팅 / 김지유
술 취한 사내가 잠든 새벽, 여자가 벽을 닦는다
벽엔 간밤의 핏자국이 묻어 있다 닦아내면 닦아낼수록 사방으로 크게 번져 황홀하게 잘 마르는 피 여자의 몸에 가시덩굴이 번져가듯 또다시 거친 문신을 새기던 사내의 눈동자엔 초점이 없다 부서진 우산살이 살아 움직이는 손가락들처럼 여자의 등짝을 움켜쥐고 있다 담뱃불에 덴 허벅지가 소용돌이 모양으로 부풀어 오른다
오래 전부터 여자의 몸은 봉방(蜂房)이다 그 구멍마다 꿀처럼 감춰진 교성을 흡혈하듯 즐기는 사내가 취해 돌아오는 밤이면, 여자는 지레 놀라 본능적으로 옷을 벗는다 사내가 휘두른 허리띠가 뱀처럼 더 깊고 집요하게 살과 뼈 속으로 파고든다
벽에 물걸레를 대자 굳은 피딱지가 금세 녹아내리며 수채화처럼 번진다 온몸이 매질로 액션페이팅된 여자가 소리죽여 울며 벽을 연신 닦아 내린다 점점 크게 핏물이 베어 가는 벽을 바라보며 여자는 습관처럼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중얼거린다
사내가 뒤척이며 물을 찾는 새벽, 검은 타액으로 범벅된 알몸의 여자가 여전히 붉은 벽을 닦고 있다
<2007년 젊은 시> 중에서 / 문학나무
렌탈의 조건 / 김지유
느지막이 일어나 정수기에서 의무처럼 생수를 받아 마신 여자가 비데 위에 앉아, 삼박사일 동안은 제 것인 잡지를 본다 공기 청정기에선 대여한 음이온이 쏟아져 나와 새벽까지 마신 조니워커의 입냄새를 지워내는 중이다
월세 삼십오만 원짜리 오피스텔, 거실에선 러닝머신에 매달린 젖은 속옷이 여자 대신 똑똑 물방울 땀을 흘린다 그 아래에서 임대 휴대폰이 혼자 울어댄다 계약기간 만료를 앞둔 낡은 애인이 애타게 여자를 부르고 있다
여자는 밤새도록 최신 디브이디 서너 개로 배우가 빌린 주인공의 삶을 다시 빌린다 쌈바 춤도 추고 조직의 보스와 열애 끝에 살인도 저지른다 반납 할 때까지 망가트리지 않게 , 계약이 끝날 때까지 깨끗하게 사랑하다 헤어지면 그만인, 렌탈의 조건
웅진 룰루 비데의 버튼을 가볍게 누르자 솟아오르는 물줄기가 여자의 항문을 애무하듯 핥는다. 어딘가에서 빌려온 여자의 몸이 바르르 떨린다.
엘리베이터 / 김지유
힘을 줘 중심을 잡을 것
원하는 도착지만 누르고 기다릴 것
스물네 시간 대기 중인
내겐 꿈도 몽상도 없으니
기대지 말 것
닫히면 곧 열리고
올라가면 곧 내려와
지하든 지상이든 원껏 건네줄 테니
흔들지 말 것
하루에도 몇 백 번씩
상상임신하길 반복하는
나의 고통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따뜻한 등을 기대오지 말 것
체온을 느낄 수 없게
거리를 유지할 것
피 대신 전류가 수혈되는
내 혈관엔 사랑의 내성이 없으니
허공에 매달린 채
쇠줄처럼 강해진 내가
행여, 오믈렛처럼 끈적이는 당신
끌어안은 채 추락하지 않도록
제발,
손대지 말 것
기대오지 말 것
- 『현대시 』 2007년 11월호.
좌욕 / 김지유
이쁜이 수술을 끝내고 돌아온 그녀가
펄펄 끓는 물로 소독을 한다
막 탯줄을 끊긴 아기가 목욕하듯
새로 태어난 그녀의 가랑이
넓어지고 늘어진 인생 바싹 죄어
떠나간 젊은 애인을 부르려나
열기에 움찔 놀라 두 눈 질끈 감고
다리에 돋는 소름에 담배 한 가치 빼문다
뜨거움에 찔끔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고
하얀 엉덩이를 주저앉힌다
아랫도리가 익어가며 죄어올수록
얼굴의 주름까지 잘라낸 듯 착각도 드는데
몇 모금 깊게 빤 꽁초를 좌변기에 던져 넣으며
좁은 대야에 엉덩이를 들이민다
맹렬한 뜨거움의 첫맛만 참고나면
덧난 사랑마저 소독 돼 새살이 돋을 듯한데
새로운 몸으로 맞이할 첫 사내 곁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마음마저 들어
그렇게 속고도 심장의 하초를 벌리려는
마음만은 늘 팽팽하게 조이는
정마저 질기게 탄력이 붙어 탱탱한
그녀가 피맺힌 사타구니를 좌욕 중이다
-웹진 시인광장 2007년 겨울호 발표
등 / 김지유
그대 등 뒤에
다소곳이 앉아
하룻밤만 있을게
뿌려대는 소금을 알몸으로 받아
뼛속 들춰가며 집어넣을게
심장까지 메마를 거야
누군가의 애인일 뿐
아내는 될 수 없는 여자
그러니 하룻밤만 있을게
새벽 동터오면
짠물에 칭칭 감긴 머리카락
풀어헤치며 일어나야지
소금 던져준 그대에게 꾸벅
인사도 잊지 않을 거야
얼음 위에 웅크리고 앉아 사랑을 낚는
그대의 등은
누렇게 타버린 아랫목, 화투패를 만지던
할아버지의 등 같아
하지만 난
그대 품에 안겨 본 적 없는 아내
이젠 애인도 될 수 없는
소금덩어리, 절여진 몸뚱이가
흰 소복 걸친 채 굳을 때까지
돌아보지 마
-웹진 시인광장 2007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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