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른다/이병률
현관문을 잠그는 버릇이 없는 나에게
누군가 들어와 넌 누구냐 한다
말릴 틈도 없이 집으로 저벅저벅 들어와
서성이는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잠시 후 그를 찾아나선 가족들이 집을 점령하고 나서야 알았다
치매인 그가 가끔 집을 못 찾는다는 사실을
그날이 아니고도 노인은 두 번 더 나의 집을 찾았다
들어와 돈을 숨겨야겠다며 집 안을 이리저리 살핀 날도 있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넌 누구냐 하며 들어왔지만 차라리 반가웠다
그 질문을 여전히 혀에 물고 있었으므로
아침부터 텔레비전에선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고 한다
무엇이건 물을 수 있다
쓸쓸하지만 네이버에 묻기도 한다
어제는 기계 공부를 많이 했다는 이에게 여러 개의 값과 가져갈 값과 하나의 값이라는 말을 들었다
알 수 없는 말 여럿 가운데 '하나의 값'이라는 말에 끌렸다
세상 모든 의문에 하나의 값이 가능할까 몰라
그 하나의 값을 갖지 못하는 일은 더 쉬울지도 몰라
이를테면 내가 당신의 누구인지 모르는 것과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것,
알게 되면 그것을 잃는 일이므로 껴안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것
'마음에 드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밤, 속옷가게 앞에서 (0) | 2008.08.18 |
---|---|
그 집에 누가 사나 (0) | 2008.08.08 |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0) | 2008.08.05 |
적벽가 /장만호 (0) | 2008.08.01 |
시인의 집 (0) | 2008.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