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말뚝

주선화 2008. 12. 30. 09:53

말뚝 / 안도현


말뚝은 땅속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것인가 땅속에서 지상으로 한 자 남짓 손목을 불쑥 뻗어 흔들고 있는 것인가 과연 말뚝에도 꽃이 필 수 있을 것인가

말뚝을 볼 때마다 그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릴 적에는 다이빙을 하면서 물속으로 온몸을 꽂아 넣어 본 적 있고 물속에서는 그녀를 향해 여기, 여기, 하며 잘난 체 손을 흔들어보기도 하였다 땅속에 나를 심는 일은 두려웠으므로

괜히, 말뚝에다 깃발을 내다 걸 수 있어야지 원, 말뚝을 뽑아 오케스트라의 지휘봉으로 쓸 수도 없는 걸 하고 투덜거렸다 말뚝은 고요하고 엄정했다 지구의 심장 박동소리를 듣기 위해 누군가 청진기를 갖다 대고 있는 것 같았고 별의 운행을 기록하기 위해 망원경을 고정시켜 놓은 것 같았다

옛날에는 말뚝이 봉놋방 주모의 기둥서방이었으나 비유의 시절이 다하자 내 친구 말뚝 하사 張하사한테 말뚝은 최저생계비였다 그러다가 말뚝은 한때 투기꾼의 하수인이었다 말하자면 제 영역을 표시하는 고양이의 오줌 같은 것이었다

지금 말뚝은 똥구멍이 예쁜 흑염소들의 탁아소 보모다 매일 아침 아장아장 걸으면서도 애햄, 헛기침하며 출근하는 염소들을 묶어 빙빙 돌리며 놀아주다 보면 해가 이마에 손을 얹고 노곤해진다 말뚝과 염소의 거리며 해와 나와의 거리를 셈해 보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하여, 나도 이제 나뭇잎을 몸에서 다 떼어내고 말뚝이 되고 싶은 거다 눈송이의 의자가 되고 싶은 거다 흰 눈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변두리 흑염소네 집도 쫄랑쫄랑 따라가 보고 싶은 거다 그때 너도 함께 가겠니?


-창비 2008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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