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박쥐 똥을 쓸며

주선화 2008. 12. 30. 09:59

박쥐 똥을 쓸며 /안도현


누옥에 와서 맨 처음 하는 일은 마루 위의 박쥐 똥을 빗자루로 쓸어내는 일

이 똥들 중에는 오래 전에 박쥐의 똥구멍을 빠져나와 이미 단단하게 말라버린 놈도 있고 그제나 어제쯤 빠져나와 좀 말랑말랑한 놈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쥐가 제 눈알처럼 까만 것들을 찔끔찔끔 내갈긴 것을 모아 약으로 쓴다고 했던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대륙에서는 박쥐 똥 속에 든 모기 눈알로 요리를 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다고 혼자 생각한다

일주일 만에 와서 박쥐 똥을 쓸며 만약 한 달 만에 와서 이것들을 쓸어 모으면 간장 종지 하나는 족히 채울 수 있으리라 나는 생각한다

밤새 서책이라도 읽을 요량으로 전깃불을 밝히면 박쥐는 나한테 똥 눌 자리를 빼앗겨버린 박쥐는 벽에 납작 달라붙지도 못하고 밤새 얼마나 똥자루가 먹먹할까 생각한다

아아, 한낱 서생인 내가 서책 따위를 읽으려고 불을 밝힘으로써 박쥐가 배변 주기를 놓치는 일은 없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작가세계 2008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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