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낙관(落款) / 정영희
새들에게 있어서
낙관이라는 습관은 오래된 풍습이었다
문신을 새긴 암벽마다 둥지가 되었고
뜨뜻한 아랫목이 되었으므로
발톱을 날카롭게 세우고 부리를 비벼 족적을 남기는 일은
축제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족적이란 새들의 풍향계였다가도 천적에게는
눈물일 수 있는 것
바닷가의 익룡 발자국 또한 그러했으리라
묵화 한 점 쳐 놓고 낙관을 해야 할 여백을 놓쳤다
자작나무 숲 물안개 사이로 새들이 까맣게 앉아 있었다
그루터기마다 태점(苔點)을 찍어놓은 듯 했다
부리는 날카로웠지만 발톱은 무뎠으니
새벽이 되도록 새들은 칠흑의 어둠을 방황해야 했다
돌아갈 곳 없는 묵화 속의 새들
강물에 먹물로나 풀어져 쪽배마냥 흘러가길 기다렸다
딱딱거리는 딱따구리는 한 칸짜리 초가집이 전부였으니
헛간이라도 한 곳 덧댔으면 좋으련만
이미 붓을 말끔히 빨아버린 뒤였다
한 무리의 새들이 화선지 밖으로 벗어나려는 찰나였다
잠시 흐름을 멈춘 강물 위에 낙관을 찍었다
푸드덕, 새들이 도처에서 솟구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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