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 / 박형준
어머니는 젊은 날 동백을 보지 못하셨다
땡볕에 잘 말린 고추를 빻아
섬으로 장사 떠나셨던 어머니
함지박에 고춧가루를 이고
여름에 떠났던 어머니는 가을이 되어 돌아오셨다
월남치마에서 파도소리가 서걱거렸다
우리는 옴팍집에서 기와집으로 이사를 갔다
해당화 한그루가 마당 한쪽에 자리잡은 건 그 무렵이었다
어머니가 섬으로 떠나고 해당화꽃은 가을까지
꽃이 말라비틀어진 자리에 빨간 멍을 간직했다
나는 공동우물가에서 저녁해가 지고
한참을 떠 있는 장관 속에서 서성거렸다
어머니는 고춧가루를 다 팔고 빈 함지박에
달무리 지는 밤길을 이고 돌아오셨다
어머니는 이제 팔순이 되셨다
어느날 새벽에 소녀처럼 들떠서 전화를 하셨다
사흘이 지나 활짝 핀 해당화 옆에서
웃고 있는 어머니 사진이 도착했다
어머니는 한번도 동백을 보지 못하셨다
심장이 고춧가루처럼 타버려
소닷가루 아홉 말을 잡수신 어머니
목을 뚝뚝 부러뜨리며 지는 그런 삶을 몰랐다
밑뿌리부터 환하게 핀 해당화꽃으로
언제나 지고 나서도 빨간 멍자국을 간직했다
어머니는 기다림을 내게 물려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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