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나의 저녁 / 손순미
찬물에 밥을 말아 먹었다 더운 바람이 불어오고 마당에 칸나가 피었다 소스라
치게 피었다 체한 것이 아닐까 이닐까 했을 때 붉은 꽃의 성대에서 칸나가 피었
다 터져 나오는 자궁의 紅燈을 어쩌지 못한 나는 주근깨가 많은 소녀였다 달은
아예 뜨지도 않은 밤에 수돗가에서 몰래 팬티를 빨았다 공포와 수치심이 온몸에
스멀거리는 꽃의 향기는 어두웠다 야광의 안구를 갈아 낀 고등어가 뒤꼍으로 돌
아나가고 나는 자궁이 쏘아대는 꽃폭탄에 배를 싸쥐고 누웠다 아침에 일어나 보
니 식구들은 밥을 먹고 있었다
칸나가 피었다 칸나만 보아도 배가 이프다 뜨거운 태양의 여름이 칸나를 지진
다 칸나의 음순이 붉어졌다 십만 볼트의 전류가 내 자궁을 지지는 고통을 지나
나는 새끼를 낳은 어미가 되었다 칸나가 어둡다 새끼를 낳은 공포의 추억이 몰
려온다
목단꽃 이불
내가 버린 이불이었나
낯익은 목단꽃 이불
지하도 사내의 몸을 덮고 있다
비켜요, 비켜, 구두들의 소란에
들썩이는 사내의 잠
목단꽃 이불이 자꾸만 새나오는 사내의 잠을
꼬옥 덮어주고 있다
밥처럼 따뜻한 잠을 배불리 먹으며
사내의 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목단꽃 붉은 옷을 입고
사내는 까마득한 유년을 방문하고 있는 것이다
사내의 등짝에 오래 보관되어 있던
그리운 집 하나가 나온다
얘야, 어서 오너라
아직도 어미의 젖은 저 우물처럼 마르지 않았단다
세상 어디에 어미만한 집이 있더냐
이미 익을 대로 익어 버린 사내에게
젖을 물리고픈 어머니는 사내의 잠을 두드린다
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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