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줄 / 이안

주선화 2022. 4. 11. 14:40

 

ㅡ이안

 

 

마트 계산대 앞에 줄을 선다

줄은 을의 방식

여러 줄에서 가장 짧은 줄을 골랐다

먹고 사는 일의 현장에서 마감 세일의 효과는

오늘 지금 줄을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급함을 일으켰다

다들 두 손 가득 일용할 양식을 들었다

 

계산대가 복잡해지자 한곳을 더 열었다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간다 순간

줄은 을의 근성으로 요동 쳤다 갑자기

내 뒤로 줄이 없어졌다

 

내게 줄은 늘 을이었다

늦은 스무 살 시절 줄을 대던 때가 있었다

아버지 손에 끌려 이곳저곳 줄을 댔지만

그들은 더 길고 특별한 끈을 요구했다

아버지는 줄로 창피했고

나는 끈으로 아버지를 실망시킨 적 있다

 

줄은 짧아야 좋고 끈은 길어야 좋은 시절이었다

 

뒤에 서니까

세상이 잘 보이고 차라리 여유롭다

애써 자리 지킬 필요도 없고 끈 댄 일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한쪽 줄이 빨리 줄어들자 발이 슬금슬금

그쪽으로 눈치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