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타인의 삶 / 이소연

주선화 2022. 8. 20. 11:05

타인의 삶

 

-이소연

 

 

조용한 가스불, 차분한 음악

침묵의 행렬을 지나 동그랗게 웅크린 말들

 

내가 홍차를 우려낼 물을 끓이고 있었을 때는

첫눈이 십 센티쯤 쌓인 아침 아홉 시였다

 

채광은 속과 겉이 같아지려 하고

우리는 납작한 사람이 되려 하고

 

나는 말하는 것을 믿고

말하지 않는 것도 믿고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는 무릎과 무릎 사이에서

잘못을 빌고 있다

 

가스검침원이 여러 차례 방문 중인데도

기분 나쁜 냄새가 나는 건 계획된 누출인가?

당신이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

눈송이처럼 사뿐한 걸음

 

이리 오렴 아이야

나는 당신의 말을 믿기 위해서 말 잘 듣는 아이를 키우지

 

오늘 아침의 홍차는 상처를 씻어낸 물 같아

속눈썹 같은 중력을 본다

찻잔 속에서 가라앉고 있는 것들

여길 나가야 살 것 같은데

 

침은 입 밖으로 나가면서 더러워지고

내 그림자는 집 밖을 나서자마자 악착같이 끌려다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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