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자본론 / 이은심

주선화 2022. 9. 26. 11:05

자본론

 

-이은심

 

 

사물도 오래되면 감정이 생긴다

젖은 헝겊으로 재갈 물렸던 빨래집게가 속옷 하나를 물고 놓지 않는다

 

다 잃고 형식만 남는 걸까

 

어쩌나 저 지조는 홀로 휘황하니 내 손등이나 긁을 뿐

짐승의 피가 흐르는 가죽냄새의 비명과 흰 손에 묻은 면장갑의 실체가 침수된다

 

잘살고 있겠지

 

문득 떠오르는 불안을 꾹꾹 눌러 짜고 빨래인 줄 알고 비틀어 짠 손목 한 켤레와

놀라도 죽지 않는 수치의 허우대를 중심 잡는 할복의 긴 빨랫줄

 

여기만 오면 왜들 뜨거운 리듬을 따라가게 될까

 

진화는 최초의 청동빛을 여의고 기둥 뒤에 숨어서 제비꽃 무늬를 새긴다

 

씨줄과 날줄이 고요해지기를

모든 습지가 발랄하게 탈수되기를

 

흘러내린 어깨에서 남향을 얻기까지 침묵의 입을 무덤으로 가져가는

집게의 윤리

 

낙마한 자의 곤고한 턱을 지나면 죄의 관절은 더욱 완고해질 것이다 반죽

음이 된 진심을 거풍시키면서 빨래집게는 더러운 것은 죽어도 물지 않는다

 

그것이 집게의 자본이다

명랑한 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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