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나의 아름다운 구멍(외 1편) / 김안녕

주선화 2025. 1. 14. 10:42

나의 아름다운 구멍 (외 1편)

 

- 김안녕

 

 

비타민 알약 하나

목에 걸려 지구본처럼 내려가지 않을 때

 

겨우 알약 하나,

 

오대양 육대주가 내 몸 안에 있네

 

한 짝만 남은 양말은 어쩌면 좋아

레몬 맛을 고를까 딸기를 고를까 그런 게

인생이면 얼마나 좋아?

 

네이버 국어사전에 배냇저고리를 검색하다가

배냇불행이란 말을 알게 된 날

타고난 불행이라니 불행을 타고난다니

 

배냇불행이라는 말 때문에 하루가 넘어가지 않는다

 

바질 잎에 난 구멍을 보고 그게 꼭 나라는 생각

시는 당초 잘못 디딘 맨홀이라는 생각

 

희망을 버리면 좋은 일이 생긴단다*

그런 말을 뱉으며 동시에

기도하는 습관

 

아픈 데로 자꾸 손이 가서

머리어깨무릎발 머리어깨무릎발 열심히 주무른다

 

그런 날엔 꼭두새벽부터 말매미가

울더라

 

 

* 영화 < 자기 앞의 생 >에서 로사의 대사.

 

 

 

돌꽃

 

 

유방에 석회가 짙게 끼어 양성 종양인지 아닌지 확인이 어렵다는 말

 

나는 점점 돌덩이가 되어 간다

 

때로는 그게 세상 편하게 느껴지기도,

 

살다 보면

극적인 순간이 온다 믿었지만

이런 그림은 아니었는데

 

무슨 혹성 탈출도 아니고

맘모톰*은

굴삭기처럼 유방을 파 들어간다

 

병원 뜨락엔 작약이 피는데

나는 잔뜩 약이 오른다

둥글고 예쁜 것들 아무리 떠올려봐도

쇳소리 잦아들지 않아

 

피 묻은 붕대

 

옜다 꽃이다,

창밖으로 내던진다

 

 

* 유방의 양성 병변을 절제하는 기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