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타오르는 책 / 남진우

주선화 2025. 1. 13. 17:42

타오르는 책

 

- 남진우

 

 

그 옛날 난 타오르는 책을 읽었네

 

펼치는 순간 불이 붙어 읽어나가는 동안

 

재가 되어버리는 책을

 

행간을 따라 번져가는 불을 먹어치우는 글자들

 

내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말들은 불길 속에서 곧두서고

 

갈기를 휘날리며 사라지곤 했네 검게 그을려

 

지워지는 문장 뒤로 다시 문장이 이어지고

 

다 읽고 나면 두 손엔

 

한 움큼의 재만 남을 뿐

 

놀라움으로 가득 찬 불놀이가 끝나고 나면

 

나는 불로 이글거리는 머리를 이고

 

세상 속으로 뛰어들곤 했네

 

그 옛날 내가 읽은 모든 것은 불이었고

 

그 불 속에서 난 꿈꾸었네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께

 

몰락하는 장엄한 일생을

 

이제 그 불은 어디에도 없지

 

단단한 표정의 책들이 반질반질한 표지를 자랑하며

 

내게 차가운 말만 건넨다네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읽어도 내 곁엔

 

태울 수 없어 타오르지 않는 책만 차곡차곡 쌓여가네

 

식어버린 죽은 말들로 가득 찬 감옥에 갇혀

 

나 잃어버린 불을 꿈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