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바탕색 칠하기 / 조우연

주선화 2025. 10. 4. 15:17

바탕색 칠하기

 

- 조우연

 

 

상실의 시대에는

가로등도 라일락도 그와 그녀의 키스도

짙푸른 바탕색에 있었죠 누가 선뜻 노랑을 등지고 있었겠나요

 

바탕색은 그런 거죠

하늘색은 영영 구름의 바탕색이고요

가파른 골목을 걸어 올라가는 남자의 바탕에는 회색을 칠해 주죠

 

교실 아이들이 툭하면 바탕도 칠해야 해요, 묻는 데에는

별이 뜨겁게 빛날 일과 차갑게 빛날 일이 

바탕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아는 탓이겠죠

 

내가 우는 걸 한참 보던 그녀가 던지길

바탕색을 고르는 건 너잖아, 그저 밤이 되어 하늘이 검은 거란다

그런 그녀도 나의 바탕색인 줄 알았어요

팔순이 다 되도록

내 멋대로 색칠을 해 왔네요

 

늦은 저녁 칙칙한 바탕을 끌고 돌아오던

그가 싫어서

그날은 빠삐용처럼 절벽 아래 나를 던져 볼까

줄무늬를 입은 나를 삼켜 버릴 듯 출렁거리는 바다가 나의 바탕

 

초록의 나무들을 바탕으로 검은 그늘이 눈부셔요

여러 해 내가 진해질수록 아련해지는 뒤 

옛것들이 보여요

 

바탕을 보기 위해 여직

무성한 것들을 그려왔는지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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