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247

2025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란 경전 - 양점순  나비는 비문을 새기듯 천천히 자수 병풍에 든다아주 먼 길이었다고 물그릇 물처럼 잔잔하다햇빛 아지랑이 속에서 처음처럼 날아오른 나비 한마리 침착하고 조용하게 모란꽃 속으로 모란꽃 따라 자라던 세상 사랑채 여인 도화의 웃음소리대청마루에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운 아이모란 그늘 흩어지는 뒤뜰 흐드러지게 피는 웃음소리그녀가 갈아놓은 먹물과 웃음을 찍어 난을 치고나비를 그려 넣는 할아버지 상처를 감춘 꽃들이할머니 손끝에서 툭툭 핏빛으로 핀다어떤 날은 긴 꼬리 장끼와 까투리가 태어난다 어디서나 새는 태어나고 어디서나 날아가 버리곤 한다 모란이 핀다, 모란이 핀다 붉은 꽃잎을 따서 후하고 불어 보는 아이꽃잎은 빙빙 돌며 아랫집 지분 위로 날아간다그 집 할아버지가 죽었다고 한다 모란 꽃잎 불어 날..

신춘문예 2025.01.15

2025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날개 - 박봉철  날개에 바닥이 있다. 어둠을 안고 일어선 곳에 깃털 냄새가 난다 어깨 둘둘 말며 방향을 잡아간다 바람은 심장을 꿰뚫듯 그림자를 비켜선다 새를 연상하며 새의 가벼운 뼈들을 통과한다 무게를 줄이는 새에게 구멍이 뚫려있다는 고고학적인 소견이 귓등을 강타한다  생각을 횃대 삼아 이렇게 가벼운 분위기는 처음이야, 상황만 점점 무거워지는 거지 무게를 덜기 위해 기낭이 풍선처럼 부푸는 듯 위를 갈아먹었던 게지 거품처럼 붉은 강물들이 몸속 번갈아 우거진 체액을 삼켰던 게지  가쁜 숨이 펼쳐진 입김들이 타원형처럼 포개졌고 빛의 멱살을 찾아 길을 낼 수 있을까 방향을 재면서 동시에 꼬리가 돋아났다 그때 주저앉는 평형의 몫은 없을 것이다  꼬리를 빙빙 돌려보내는 하마, 위험할 때 철썩, 철썩 보내는 비버,..

신춘문예 2025.01.07

202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애도 - 이희수  거대한 알이 깨지고 흰자처럼달이 흘러나왔다 어둠이 왔다 여자는 폐건전지를 투명하고 긴 통에 모은다 위험한 유리 기둥이 나타난다 고요로쌓은 돌무덤과 따로 함께였다가 함께 혼자인 구석이 생겨난다 주석이 본문보다 더긴 하루이다 분리 수거를 마친 여자는 댓글을 읽는다 잘근잘근 씹으며 누군가를 죽이는 잔뜩 벌린 입이 있다 냉장고 문 손잡이를 잡고 여자는 가만히 얼어붙는다 쥐도 새도 모르게 누군가 죽어가는꾸욱 다문 입이 있다 거대한 얼음이 냉장고에서 걸어나와 빙수 기계에 올라앉는다뼛가루가 수북해질 때까지 돌리고 돌려도 끝끝내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갔을까 여자는 새발뜨기를 한다 새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발자국을 찍고 시접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닫힌다 옷감은 희고 발자국은 푸르다 끝단이 닫히고 쌀무더..

신춘문예 2025.01.07

202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디스토피아 - 백아온  플라스틱 인간을 사랑했다. 손등을 두드리면 가벼운 소리가 나는.그는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말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자기가피우는 카멜 담배의 낙타가 원래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거나 레몬청을 시지 않게 만드는 법 같은 것들을 말해줬다. 나는 그의 말들을 호리병에 넣어두었다. 언젠가 그것들로 유리 공예를 하고 싶었다. 매일매일 그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말이 많은 사람이아니었지만, 그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항상 쇼윈도 불이 꺼지고, 조명 상가들도 문을 닫았다. 집에 돌아가면 투명한 호리병을한참 바라보다 잠이 들곤 했다. 그의 작은 이야기들을 모아둔 호리병을. 그와 있다 보면, 아주 잠깐이지만, 세상이 진짜라고 믿어졌다. 그도 마찬가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망..

신춘문예 2025.01.06

202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 안수현 윗집은 오늘도 많이 더운가 보다아무렇게나 잘라두어 우리 집 창문에 아른거리는에어컨 실외기 호스에서물이 뚝뚝 떨어진다 엄마는 시끄럽다면서도마른 토마토 화분을 물자리에 밀어둔다 새순 발끝을 받치고 있는 큰 줄기손끝이 새파랗다너를 이렇게밖에 밀어올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는누군가와 닮았다 왜 자꾸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걸까,그냥 그렇게 된 건데 우린순진한 토마토일 뿐인데 어차피 충분히 어른이 되면고개를 깊이 숙이고자신을 떨어뜨려야 할 텐데 땅에서 났으면서도먼 하늘만 보고 자라땅에 묻히기를 두려워하는엄마 없는 엄마와 엄마밖에 없는 딸 토마토는 어디에서든 뿌리를 내린다홀로 오래 있었던 토마토 과육에선제 심장을 디디고 선 싹이 자라곤 한다해묵은 양수를 받아마시며, 그것..

신춘문예 2025.01.04

2025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예의 - 최경민 옆자리가 그랬다살아있으면 유기동물 구조협회구요죽어있으면 청소업체예요 나도 알고 있다지금 나가면누울 자리를 뺏긴다는 걸 그래도 가야 한다새벽에 하는 연민을이해하지 못하면서 반대편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불쌍했다고 말했다 불행히도 고양이는새벽에 일어난 우리들보다조금 더 불쌍하다 그래도다 보고 올까요죽어 있는 것도살아 있는 것도 우리는 그러기로 했다관할구역 끝까지 갔다사실은 좋아하지 않는 걸 하는 게기본 예의가 아닐까생각하면서

신춘문예 2025.01.04

202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가담 - 박 연 우, 너는 언젠가 영가들은 창문으로 다닌다는 말을 했지. 그 뒤로밤이 되면 커튼을 쳐두었다. 낯선 영가가 갑자기 어깨를 두드릴까 봐. 두려운 일은 왜 매일 새롭게 생겨날까. 가자지구에서 죽어가고 있는사람들. 소년들은 처음 보는 사람을 쏘았겠지. 총알이 통과한 어린이마와 심장. 고구마 줄기 무침 먹으면서 봤다. 전쟁을 멈추지 않는나이 든 얼굴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빌미로 이익을 얻으려 한다는 말을 들었어.맨발로 거리를 걷고 싶다. 너는 내가 추워할 때 입김을 불어줄 테지.거리에서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입혀 둔 스웨터를 보자. 보라색 바탕에 웃는얼굴이 수놓아져 있던 스웨터를 기억해?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음흉해서, 음흉이라는 이름을 붙였잖아. 세상에 그런 음흉만 있다면 어떨까. 나무를..

신춘문예 2025.01.04

202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아름다운 눈사람 -이수빈  선생님이 급하게 교무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신다 나는두 손을 내민다 선생님이 장갑을 끼워주신다 목장갑 위에 비닐장갑을 끼우고 실핀으로 단단히 고정해주신다 나는 손을 쥐었다 편다 부스럭 소리가 난다 마음 편히 놀아선생님이 말씀하신다 운동장 위로 얕게 쌓인 눈 새하얗고 둥글어야 해 아이들이 말한다 눈을 아무리 세게 쥐어도 뭉쳐지지 않고 흩어진다 작은 바람에 쉽게 날아간다 흙덩이 같은 눈덩이를안고 있는 아이들 드러누워 눈을 감고 입을 벌리는 아이들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다룬다 개를 쓰다듬듯 품에 안은 채 몇 번이고 어루만진다 눈덩이가 매끈하게 단단해진다 아주 새하얗고 둥근 모양의 완벽한 눈덩이를 갖는다 눈덩이가 내 품속에 있어서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고그 세상이 아름다운 것도 같..

신춘문예 2025.01.03

202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사력 - 장희수  할머니가 없는할머니 집에선 손에서 놓친 휴지가 바닥을 돌돌 굴렀다 무언가 떨어져 가는 모습은이렇게 생겼다는 듯 소금밭처럼 하얗게 펼쳐지고 어떤 마음은 짠맛을 욱여가며 삼키는 일 같았다 그중 가장 영양가 없는 것은포기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라 생각해본 적 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포기할 수 있었다면 또다시 포기하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생길 리 없을 테니까 할머니도 이제야 뭔들관두는 법을 배운 거겠지 다 풀린 휴지를 주섬주섬 되감아보면 휴지 한 칸도 아껴 쓰라던 목소리가,귓등에서 자꾸만 쏟아지는 것 같았는데 쏟아지면 쏟아지는 것들을 줍느라자주 허리가 굽던 사람의 말은 더 돌아오지 않는 거지 죽을힘을 다해본다 해도 사람들은 영정 앞으로 다가와국화꽃을 떨어트리고 멀어져 간다 정갈하고 하얗게 펼..

신춘문예 2025.01.02

다락빌레*의 소(沼)로 간 소 / 안시표

다락빌레*의 소(沼)로 가 소 -안시표  섬 노을이 바다를 펼치면 다락빌레 벼랑 속으로거친 숨결 하나, 하늘로 간 沼에 소가 있었지도시의 아파트 한 채처럼 송아지를 분양받은 큰어머니차양 넓은 햇살이 작은 어깨에 내려앉아들판의 하루가 감투로 숨 차오를 때다락빌레 한가운데 沼의 잘근잘근 대는 소리에잠시 쉬어가고는 했지하양 떠밀려 오는 벼랑 파도 소리가무성한 파동을 이끌고 수초의 혼을 빼놓을 때개구리 숨죽이며 알 낳은 소리, 공기 방울로 터져나오고진흙 물뱀 꼬리는 바람의 온기를 감추며 저물어 갔지어디선가 장수풍뎅이 물가에 지문 찍듯 沼 지천을 쿵쿵 울리며소의 발굽 소리 다가올 적, 겁 없이 손에 쥐어진 버들 막대 하나물가에 비친 늙은 호박 같은 엉덩짝을 찰싹 내리치고는 했어목을 축이는 소의 울음 곁, 하얀 목..

신춘문예 2024.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