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247

2024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미싱 -성욱현 몸에 맞추어 옷을 만들던 시절은 지났다 우리는 만들어진 옷 속에 몸을 끼워 넣는다 입지도 않는 옷을 산 걸 후회했고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옷이 쏟아지다니, 이게 뭐니 창고에 갇힌 미싱은 소리 없이 울면서 혼자 돌아갔겠다 할머니가 늙어가는 소리처럼 소리 없이 할머니를 입는다 미싱을 배울 때가 좋았어 할머니는 사라질 것만 같은 쵸크 선을 따라서 엉킨 실을 풀며 매듭을 새기며 몸에 맞는 옷을 만들었겠다 미끈하고 곧게 선 재봉틀 위를 걸어가던 할머니는 두 발을 가지런히 하고 누워 계신다 열여덟 살 소녀가 누운 나무 관, 삐걱거린다 새 옷에서는 차가운 냄새가 난다 몸은 언제나 헌것이라 옷보다 따뜻한 것일까 치수를 재어 나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며 할머니는 오래된 치마처럼 낡아가며, 얇아지고 있..

신춘문예 2024.02.06

2024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둥근 물집 -우정인 골목 어귀 잊을만하면 문을 여는 과일가게가 있다 잊히기 전에 나타나는 젊은 사내 하나와 모퉁이의 걸음 수를 재는 사과가 있다 사과는 욕심이 많은 아이처럼 붉은 얼굴을 하고 있다 사내는 맛 좀 보라고 사과 한 조각을 잘라 내 입에 들이민다 나는 깜짝 놀라 속살 속에 스미는 쓸쓸한 음각을 혀 밑에 감추었다 아직 바람도 다 익지 않은 가을인데 햇살이 잘 밴 사내의 어깨에 기대는 상상을 한다 오래 전에 놓친 이슬 냄새가 날지 모른다 풋잠이 들었을 때 그의 손이 닿으면 나는 동그랗게 몸을 말겠지 상상은 순식간에 과일가게에 퍼진다 상자들이 들썩인다 하룻밤 미쳐서 그의 싱싱한 심장을 베어 먹을 수 있을까 그의 여자로 과연 그러다가 사내에게 물었다 얼마예요? 주춤, 사내는 고개를 흔들며 시선을 돌린..

신춘문예 2024.02.05

2024년 한국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산벚꽃 피는 달 -김제이 달을 보면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 저 달 언덕에 산벚꽃나무숲이 있었지, 난 날마다 산벚꽃나무숲 언덕에 올라 지구를 바라보았지, 지구를 보고 있으면 왜 그렇게 가슴이 뛰던지, 지구에도 산벚꽃나무숲이 있을 거라 믿었지, 거기 선벚꽃나무숲 언덕에서 누가 날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 그때는 정말 이제 생각 나, 내가 저 달에서 떠나온 거 맞아, 내가 떠나올 때 잘 다녀오라고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손을 흔들어 주던 너, 너의 젖은 눈이 생각나, 너와 함께 걷던 산벚꽃나무 숲이 생각나, 저기 산벚꽃 핀 언덕 아래 작은 절에서 날 위해 엎드려 기도하고 있을 네가 생각나, 어서 달빛 동아리를 내려줘, 나 이제 돌아갈 거야 그런데 이를 어째, 나 여기서 한 여자를 얻어 두 아니를 낳았으니-..

신춘문예 2024.02.02

2024년 영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극빈 -김도은 그 많은 소란과 발걸음과 악다구니들을 겪고도 골목은 여전히 휑하다 그늘이 묻은 소매 끝에 삶은 돼지머리 냄새가 가득하다 이마를 풀어헤친 나무의 복선 사이로 저기, 좁은 골목 끝으로 환한 끝이 보인다 그 끝으로얼마나 많은 이쪽을 저쪽으로 끌어들였나 기울어진 지붕 끝으로 끌어 내린 저 어둑한 그늘들은 누구의 뒤끝들인가 더는 새것이 찾아오지 않는 양쪽을 둔 사이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제 아무도 이쪽 또는 저쪽에 속지 않는다 한때 유일한 재산이었던 포물선들은 조금만 펴거나 휘어도 뚝 부러지고 말 것 같은데 군더군데 구멍 난 혁명가를 입은 노인은 질긴 옛날 노래를 잇몸으로 부른다 극빈은 출렁이는 극한의 자세 팔꿈치에 휘감은 불안은 바짝 마른 저수지보다 컸다. 여전히 붙잡아두고 싶은 것들은 아름답지만..

신춘문예 2024.01.31

2024년 중부광역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자물쇠 -박찬희 안거가 일이라고 단단히 가부좌를 틀어 오가는 바람도 굳어 서 있다 하필이면 벼랑 끝에 걸어놓은 맹약 효험이 낭설이기 십상이기도 하고 굳이 풀어 들여다볼 상당한 이유가 없어도 그저 보는 것만으로는 잡다한 호기심만 늘어 없는 설명서를 찾아 읽는다 맹약의 해피엔딩은 녹슬고 녹아 서로에게 귀속되는 것 애지중지 닫아걸 별 이유는 없어도 그냥 슴관인 까닭에 벽을 치고 들어앉아 음과 양을 저 혼자 맺고 풀면서 맞지도 않은 열쇠를 깎는 일 어쨌든 그것도 수고라면 수고지 결속과 해지는 엎어 치나 매치나 한가지여서 틀림없는 쌍방의 일 자물쇠든 열쇠든 서로에게 맞출 수밖에 옳으니 그르니 해도 꼭 들어맞는 짝은 있게 마련인데 내가 너를 열 수 있을까 시도 때도 없는 옥쇄 앞에서 밤낮 우물쭈물, 나만 속절없이 ..

신춘문예 2024.01.31

2024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시운전 -강지수 날 때부터 앞니를 두 개 달고 태어난 아이치고 천성이 소심하다 했습니다 가장 부끄러운 기억이 뭐예요? 종합병원 의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발가벗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았을 때요 그게 기억나요? 최초의 관심과 수치의 흔적이 앞니에 누렇게 기록되었지요 나와 함께 태어난 앞니들은 백일을 버티지 못하고 삭은 바람에 뽑혀야 했지만, 어쩐지 그놈들의 신경은 잇몸 아래에 잠재해 있다가 언제고 튀어 올라 너 나를 뽑았지, 우리 때문에 너는 신문에도 났는데, 하고 욱박을 지를 것 같더란 말입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대大자로 뻗었을 때 혹은 동명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 그럴 때에는 앞니를 떠올려보곤 하는 겁니다 천성이란 무엇인지, 왜 어떤 흔적은 흉터로서 역할하지 못하고 삭아져버리는지 당신, 당신은 한 번 죽은 적..

신춘문예 2024.01.23

2024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상현달을 정독해 주세요 -박동주 햅쌀을 대야에 가득 담아요 차고 푸른 물을 넘치도록 가득 부으면 햅쌀은 물에서 부족한 잠을 채워요 쌀눈까지 하얗게 불었을 때 당신을 향한 마음이 몸을 풀어요 상현달처럼 차오르는 마음을 알아차렸다면 속삭여 주세요 도톰한 떡살에 소를 넣어요 당신을 향한 비문을 골라내고 꽃물결 이는 구절만 버물려 소를 만들어요 당신 생각으로 먹먹해지는 마음이 색색의 반달로 차오르도록 한밤중이 되었을 때 서쪽 하늘을 골똘히 보아 주세요 반죽을 작게 떼어 양 손바닥 사이에 넣고 가을볕이 등을 쓰다듬듯 잔잔히 궁글려요 이야기를 담은 소를 가운데 넣어 가을 한나절을 빚은 색색의 상현달들 떡살에 별자리가 뜨기도 해요 비껴간 당신을 향해 밤하늘이 높이 상현달을 띄워요 이야기가 스며든 빛깔의 편지지 하얀 ..

신춘문예 2024.01.22

2024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파랑 -엄지인 잔디를 깎습니다 마당은 풀 냄새로 비릿합니다 잔디가 흘린 피와 눈물이라는 생각 우린 서로 피의 색깔이 달라 참 다행이지 혈통이 아주 먼 사이라서 머리카락을 자르고 잘린 끝을 만져보는데 아프지 않습니다 심장과는 아주 먼 거리일까요 손 뼘으로 잴 수 있지만 누군가는 머리에서 심장까지 전력을 다해 뜁니다 머리카락 입장에선 불행일지 모른다는 생각 골목 밖에선 길냥이의 울음소리가 날카롭습니다 고양이는 사람에게만 소리 내 운다고 하는데 축축한 여기 그냥 좀 내버려두라고 배가 헐렁한 동물에게 보내는 우호적인 경고라는 생각 다치지 않게 손톱 칼로 조심히 군살을 깎지만 소스라칩니다 가장자리에서 바깥으로 밀리지 않으려는 비명 TV에서는 기상 캐스터의 주의보가 쾌속으로 지나갑니다 암거북들이 짝을 잃고 더운 바..

신춘문예 2024.01.18

2024년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감정일기 -송상목 매일 아침 여덟 시면 슬픔을 마주친다 그와 인사하고 같은 전철을 타고 버스에 올랐다 내리고 빌딩을 오르고 나면 정오가 된다 정오는 기쁨을 만날 시간 나는 잠시 슬픔과 작별하고 수저를 든다 기쁨이 키스해온다 지저분한 기쁨이 기분 나쁘지 않다 키스는 짧고 오후는 길다 나는 다시 슬픔을 본다 슬픔은 지치고 피곤한 기색이다 매일 같이 다니기 힘든 듯이 나는 빌딩을 쌓으며 슬픔의 눈치를 살핀다 슬픔은 슬퍼하면서도 빌딩 쌓기를 멈추지 않는다 아무래도 슬픔이 쌓아가는 것은 빌딩만이 아닌 것 같다 밤은 빌딩을 내려오는 때 슬픔이 가장 먼저 달아난다 나는 기쁨을 볼 생각으로 가득해진다 기쁨은 집에 있다 마구 꼬리를 흔들며 내게 달려든다 기쁨은 꽤 나이 들어있고 눈은 끔뻑거린다 느린 속도로 슬픔이 슬쩍슬..

신춘문예 2024.01.17

2024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달로 가는 나무 -김문자 달의 범람으로 하늘의 문이 열리면서 땅은 다섯 개의 줄기로 자라는 은행나무의 품이 되었다 보름달 상현달 하현달 초승달 그믐달을 키우는 인천 장수동 사적 562*번 800년 된 은행나무 처음부터 약성이 쓴 뿌리에서 시작되었다 오래된 나무는 달에서 왔다 달이 몸을 바꿀 때마다 은행나무의 수화는 빠르다 전하지 못한 말들은 툭 떨어지거나 노랗게 익어갔다 은행나무는 자라면서 달의 말을 하고 은행나무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은 바닷물이 해안까지 차오르는 슈퍼 문일 때 남자는 눈을 감고 여자는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고 한다 오래된 나무의 우듬지는 800년 동안 달로 가고 있다 소래산 성주산 관모산 거마산을 거느린 장수동 은행나무 달빛이 은행나무 꼭짓점을 더듬는 농도 짙은 포즈 은행나무는 품을..

신춘문예 2024.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