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김륭
아버지 바지가 빨랫줄에 걸려있다.
헐렁헐렁한 바지를 빠져나간 아버지는 젊은 운전기사에게 멱살 잡혀있었지
만 편안해 보였다. 아니, 어르신 낮술 꽤나 드셨으면 집에 가 주무시지
도로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버스를 가로막으려 했다고
벌레 씹은 얼굴로 투덜거리는 金순경 입가로 스멀스멀 기어오르던 아버지
밥알 같은 눈빛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가로막은 건 버스가 아니라 번쩍, 손들어도 서지 않는 길이었다고
제발 한번만 봐달라고 金순경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어머니, 염소
울음소리에 새 울음소리까지 섞어낼 줄 아는 당신 치마폭에 쌓인 아버지는
아버지의 어머니 그러니까 나는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가 낳은 게 아니라
동해안 어느 깊고 푸른 바다에서 잡아온 게 틀림없었다.
조마조마 불꺼진 아궁이를 살피듯 불안한 어머니 눈동자 속으로
또다시 겨울이 오고 있었다.
간과 쓸개 다 빼주고도 물먹은 명퇴 아버지에게 세상은 공중누각이었을까
펑펑 눈발 날리는 황태덕장이었을까
멈추지 않는 길에서 배가 뒤집어진 아버지의 낡은 구두 한 짝, 내장을 빼낸
다음 낮엔 녹이고 밤새 얼린 황태 한 마리 어머니 치맛자락에 매달리고
드르렁 드르렁 푸, 푸후 푸후 내 등에 업혀 코고는 아버지에게
고래가 사는 바다는 얼마나 멀까
아버지를 주르륵 벗어 내린 아버지의 바다가
빨랫줄에 매달려 꽁꽁 얼어붙고 있다.
<웹진 시인광장 2007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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