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박주택의 자선시편

주선화 2009. 11. 11. 23:05

박 주 택 자선시편 / 아름다운 청소년, 시인과 놀다.

 

박주택
1959년 충남 서산에서 출생했으며 경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8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꿈의 이동건축』『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사막의 별 아래에서』『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등의 시집을 발표했다.

시론집『낙원 회복의 꿈과 민족 정서의 복원』과 평론집『반성과 성찰』『붉은 시간의 영혼』『시간의 동공』등을 펴냈으며 현대시작품상, 소월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국문과 교수.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그 무렵 잠에서 나 배웠네
기적이 일어나기에는 너무 게을렀고 복록을 찾기엔
너무 함부로 살았다는 것을, 잠의 해안에 배 한 척
슬그머니 풀려나 때때로 부두를 드나들 때에
쓸쓸한 노래들이 한적하게 귀를 적시기도 했었지만
내게 병 病 은 높은 것 때문이 아니라 언제나 낮은 것 때문이었다네
유리창에 나무 그림자가 물들고 노을이 쓰르라미 소리로
삶을 열고자 할 때 물이 붙잡혀 있는 것을 보네
새들이 지저귀어 나무 전체가 소리를 내고
덮거나 씻어내려 하는 것들이 못 본 척 지나갈 때
어느 한 고개에 와 있다는 생각을 하네
나 다시 잠에 드네, 잠의 벌판에는 말이 있고
나는 말의 등에 올라타 쏜살같이 초원을 달리네
전율을 가르며 갈기털이 다 빠져나가도록
폐와 팔다리가 모두 떨어져나가
마침내 말도 없고 나도 없어져 정적만 남을 때까지

 

얼음은 날개를 가지고 있다

 

두 개의 눈이 있다 하나의 눈은 그의 아버지의 것이다
또 하나의 눈은 그의 것이다
처음, 아버지로부터 그가 유습한 것은 수평이었다
넓고 딱딱한 어금니, 폐였다 광야였다
그리고, 들소를 뜯어먹고 몸속에 자라는 산맥이
그를 깎은 절벽으로 만들었다 그곳에는 얼음이 붙어 있다

그는, 육체로 정신을 배반하지 않았다
팽팽히 육체를 당겨 절벽으로 만들었다
마침내, 눈 덮인 산맥을 사납게 휘몰아쳐
그 스스로 수직의 아버지가 되었다

 

꿈의 이동건축

1

목재를 실어 나르는 화차 貨車 를 타고
숲으로 가네
수맥을 짚어 한 모금의
물을 마시는 동안
구름이 어둡게 어둡게 몰려오지만
풀밭에 제비꽃 몇 장 숨기고 있겠지
훠어이 훠어이 부는 바람같이만
처음인 곳으로 가는 나중의 하늘
숲 속으로 들어서면 푸른 잎맥의 바다
물레를 잣는 어머니처럼 부드럽게
하늘이
내게로 내려와 물을 주시고
마을의 풀밭에 씨앗을 뿌리시고.
아하 바람은 한사코 내 머리 위에 머물러 있다.
끌로 땅 끝을 깎아 나무들 사이의 행적 行蹟 을 깎아
햇살을 모아 두면서, 바람의 옆모습을 지켜본다.
세계는 옆으로 열리고 열린 창문처럼
쑥 뿌리가 내 겨드랑이 털까지 휘감아 돈다.

 

2

뽑힌 노을은 동 東 쪽 하늘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창포 꽃잎이 티눈처럼 손바닥에 퍼지고
귀에 잡힌 푸른 공기, 푸른 목숨이 서럽게 느낄 무렵
가슴속 얽혀 있는 내 생애 生涯 를 점치리라.
별을 보며, 넓적다리에 진득거리는 절망을 떼어다오.
어제처럼 노을 위에 누울 때
까마귀 떼 내 발밑으로 돌아와 눕고

무릎 사이로 말할 수 없이 많은 강물이 빠져나가 시
방, 내 앞을 지나가는 사랑 앞에 서면 반딧불보다 더 빛
나는 나뭇잎들. 산이 되는 바람에 의해 숲을 건너온 강
물은 팽팽한 슬픔을 만드는데
나는, 흡반으로 길고 먼 바다를 빨아들인다.

한 마름의 비단으로 아버지가 가슴을 껴안네.
이 손바닥에 비쳐지는 단 하나의 바다. 우수의 불꽃.
안개 표지판 없는 생애 生涯 의 채찍을 몰아
서 西 녘 하늘 굽이굽이 돌아 모두
내 집으로 불러들이는
내 뒤를 밟던 새 떼.

 

3

손수 나의 흉금을 털어놓자
화살 모양의 안개는 지평선 밖으로
과녁을 찾아 떠나가고.
나는 집 구조와 가구들을 이동시킨다.
강물 때문에 어느새 현기증이
높낮이의 생애를 닮아가도
나는 다시는 태양을 찾지 않는다.
처음으로 약속받은 땅의 일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이것은 바꿔지지 않는 것이므로.
다만, 나무들이 지평 위에서 나를 지켜보기 위하여
날마다 까마귀 알을 받아낼 뿐이므로.

그러면서도, 생명을 낳고 뜨거운 혈맥을 찾아 계곡을
건너온 물소리가 굽이굽이 천장을 올리고, 허물을 벗는
바람을 얼러 등 굽은 회양목 아래서 또다시 깊은 잠을
자리라. 그때는 겹겹의 사랑이 땅 끝에서, 살아 있는 나를
눈물겹게 껴안아 주리라.

내 입의 불, 어두운 저녁녘에 그려내는 내 눈이 태양 太陽 .
꿈의 세계로부터 빛나는 아름다운 약속.

지평을 밝히는 꿈으로 새는 날아가고
머리에 불꽃을 이고 아침.
나는 잠을 깬다. 일찍이
내가 화차 貨車 를 타고 이주해 온 숲의 아침에
맑은 햇살이 거미줄을 투명하게 비춰주고
보물과 곡식들이 가득 찬 나라에서, 말하리라.
깊이를 숨긴 고독 속 새로 남아
내 굴레가 무엇이며
어떤 속박으로 죄어드는가를.
그때, 사과나무에서 꽃이 피고
양떼들의 풀밭에 양떼구름이
어떻게 순례하는가를.

 

시간의 동공

 

이제 남은 것들은 자신으로 돌아가고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만 바다를 그리워한다
백사장을 뛰어가는 흰말 한 마리
아주 먼 곳으로부터 걸어온 별들이 그 위를 비추면
창백한 호흡을 멈춘 새들만이 나뭇가지에서 날개를 쉰다
꽃들이 어둠을 물리칠 때 스스럼없는
파도만이 욱신거림을 넘어간다
만리포 혹은 더 많은 높이에서 자신의 곡조를 힘없이
받아들이는 발자국, 가는 핏줄 속으로 잦아드는
금잔화, 생이 길쭉길쭉하게 자라 있어
언제든 배반할 수 있는 시간의 동공들
때때로 우리들은 자신 안에 너무 많은 자신을 가두고
북적거리고 있는 자신 때문에 잠이 휘다니,
기억의 풍금 소리도 얇은 무늬의 떫은 목청도
저문 잔등에 서리는 소금기에 낯이 뜨겁다니,
갈기털을 휘날리며 백사장을 뛰어가는 흰말 한 마리
꽃들이 허리에서 긴 혁대를 끌러 바람의 등을 후려칠 때
그 숨결에 일어서는 자정의 달
곧이어 어디선가 제집을 찾아가는 개 한 마리
먼 곳으로부터 걸어온 별을 토하며
어슬렁어슬렁 떫은 잠 속을 걸어 들어간다

 

시간의 육체에는 벌레가 산다

 

트럭 행상에게 오징어 열 마리를 사서
내장을 빼내 다듬었다, 빼낸 내장을 복도의 쓰레기봉투에
담아 한켠에 치워 두었다, 이튿날 여름빛이
침묵하는 봉투 속으로 들어가 핏기 없는 육체와 섞이는 동안
오징어 내장들은 냄새로 항거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장마가 져 나는 지붕 위에 망각을 내리지 못하고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헛된 녹음에 방문을 걸고 있을 때
살 썩는 냄새만이 문틈을 타고 스며들고 있었다
복도에는 고약한 냄새만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방 안 가득 풍겨오는 냄새를 맡으며 냄새에도 어떤 갈피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더 정확히는 더러운 쓰레기를 힘겹게 내다
버려야 할 것이라는 생각과 싸우고 있었다

비로소 나는 복도의 문을 열었다
비가 멎고, 싸우고 난 뒤의 불안한 평온이
사방에 퍼져 있었다, 공기가 젖은 어깨를 말리고 있었다
발자국에 곰팡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막 열쇠로 지옥 같은 문을 잠그고 돌아설 때쯤
핏기 없는 냄새가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무덤에서 냄새의 뿌리로 태어난 수많은 구더기들이
시간의 육체 속으로 흩어져 갔다

 

강남역

 

그리하여 시간이란 계급을 재편성하는 과정이란 느낌이 들 때
햄버거는 입 속에서 혈관을 터트리고 커피는 저녁처럼 어두워졌다
순환하는 인간들, 청춘은 중년이 되고 또 다른 청춘은
이곳을 가득 메우며 노년에 이르게 됨을 눈치 채지 못한다
이십 년 전에도 그랬다, 포장마차가 즐비하던 자리는
고층으로 새를 부르고 검게 그을린 유리창에 잎사귀를 부르지만
저 싱싱한 다리는 아주 기분 나뿐 팔자를 만나
저녁의 숙명에 흘러가는 것을

화장품 상점에서 환한 빛으로 나오는 여자가 남자 속에서
둥글어지는 여름이다, 땀내 무럭무럭 자라 보잘 것 없음이
나의 나라라는 것임을 마침내 떠가며 알아갈 것이니
여름이란 이곳을 차지하던 그 누군가들이 부푼 육체 속에
청춘의 찜통을 채우는 일이다, 편성된 계급에 기대어
유리창 너머로 들리는 꿈의 찰칵거리는 소리에
혹독한 운명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평화가, 평화가, 나의 국가에서 울려 퍼지는 것이라고
저 시간은 벽 속에 도는 피에 빗대 저녁을 침묵시킨다

 

저수지에 비친 시

 

오래 살던 곳을 되짚는 일이란
잠든 망각을 그리움으로 완성시키는 것
현재의 자신과 과거의 자신이 싸우며 나지막하게 떠는 것
지붕이 타오르고 있었다
저곳이 원적이란 말인가 
지문이며 우물이며 교회며 발자국 뒤로 저벅여 오는
온갖 것들의 鬼스러움이며 순간적이지만 자루에 묶여 있는 숨들
아궁이는 무엇을 먹을 때마다 괴로워했다

뿌리를 만질 때 굴뚝 연기가 나타나오는 것을 본다
푸른 눈동자였다 그때는 무엇이 숲 사이로 오는가
빛이 흐려지고 돌아오는 것들의 산발치에서
후루룩 여우가 일어서는데
발목부터 뻗어 오르는 관목이 있다면
탄식부터 멸망시켰어야 하리라 
산중에 도사리고 있는 뱀과 같이 노을은 저물고
저녁을 덮는 물은 교회의 망루에서
저수지에서 서성대는 숨을 향해
계명을 외우라며 비명을 지른다 

 

이별의 역사

 

극장 앞에는 의자가 놓여 있네
그 의자 비에 젖네 가을비 내려 뒹구는 잎사귀 젖고
술집의 문고리도 젖어 잠마저 젖는 어느 가을날
이별이 이토록 쉬운 것이라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네
기억은 가물거리지도 않고 평생을 바친 힘으로
한사코 망각을 물리치네, 이것이 누구의 이별이든
모든 이별에는 흐느낌이 있네, 잠 못 드는 저 애인들

술집에서, 작은 방에서, 깊은 시름에서
그림자마다 조금씩은 비가 젖고 인간의 역사가
이별의 역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올지라도
이별은 언제나 처음인 것을 그리하여, 몸은 아프고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프고 두려운 아침이 오지만
그러나 이별도 순환하여 사랑이 사랑과 만나는 것처럼
이별도 이별과 만나 사랑이 낳은 이별을 힘껏 껴안는 것이라네

 

문양

 

안내견 앞서가네, 눈을 끔벅거리며
약국 앞 지나네, 먼 길을 걸어온 듯 혀를 길게 빼물고
사람들이 비켜주는 길을 따라 土曜日 속으로 걸어오네
벚꽃 피는 봄날이었네 마음이 도굴되는 봄날이었네
바람은 사랑에게서 불어오는 것이라고 아름다운 눈에서
불어오는 것이라고 꽃가지는 흔들고 모오든 노래들이 펄럭일 때
바람들 고요에 들어 고요의 상속을 기다리네
이렇게 흰꽃잎 들여다보는데 마음은 피고 물은 흐르는데
고소한 기름 냄새 풍기는 봄날
바야흐로 빛을 배워 눈 열리는 봄날
놓친 것들이 돌아오는 길목
안내견 한 마리 눈을 끔벅거리며 성자처럼
흰옷을 펄럭거리며 꽃잎 속을 걸어오시네
사람들 다친 마음을 어루만지며
횡단보도 걸어오시네

 

저녁 눈

 

스치는 사람들 눈을 바라보는 짧은 순간
나는 그의 눈에 감긴다, 열렸다 닫히는 눈에 감겨
아득하게 소용돌이 속 비명에 닿은 채 또한 눈이 내리는
거리를 걷는다 잎이 채 사라지지 못한 채 거리에 잎이 뒹구는 것은
불멸의 탓, 눈동자 속의 허기진 날개 탓
이쯤해서 나는 내가 저지른 광기와 수치를 고백하련다

눈이 오는 창가
불이 밝아오면 약속은 어디에서 모여 배반을 꿈꾸는지요
허공에서 펄럭이는 혀

나는 풀도 나무도 없는 거리를 죽음의 거리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내 눈에 감겼다 풀려나오는 저 몸뚱아리들은
이제 누군가의 눈에 감겨 일용한 양식도 될 법한 일
그러나 고백은 입 속에서 맴돌고 나의 수치도 망각을 기다리는
눈치인데 저 내리는 눈은 헛것처럼 사람들을 휘감으며
이름을 휘감다 땅에 고요히 욕망의 정원을 만드는데
나는 이곳에서 펄럭거리는 혀가 뱉어내는 말들을 참으며
긴 술잔에 잠겨 그리운 약속에 비틀거립니다

 

머나먼 나라

 

제과점 앞 땅에 질질 고무다리를 이어 붙인 사내
납작 보도블럭에 몸을 붙인 채 머나먼 나라로 이동 중이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 낙엽이 후두둑 몇 잎 날리며
단편 영화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스피커 고장이 났는지
말썽이다 저 속도라면 피자점까지는 한나절이겠다
늦는다는 것에 화가 난다 십 분이라면 혁명이라도 할 시간
부질없이 미움이 싹이 트려하는데 찬송가가 울려 퍼진다
일순간 음악에 휩싸여 사내는 거룩한 몸을 움직여
죄 짐 맡은 것처럼 피해가는 여자들 다리를 향해 치뜨며
꼿꼿이 머리를 세우며 머나먼 나라를 간다
사내에서 여자까지, 제과점에서 피자집까지
다시 바람이 불어 나무에서 지상까지 아니, 전철역에서 이곳 제과점 앞까지
늦은 죄로 벌건 얼굴로 뛰어오는 사람을 본다
머나먼 나라로 뛰어 오는 중이다, 그리고는 갑자기 유리병 장수를
발로 차 밀어뜨리는 프랑스 시인의 시 생각, 파리의 우울
머나먼 나라에 닿기 위해 땅에 몸을 가는 영혼들
그 모든 나라들 떨어지는 꽃잎과의 거리 

 

감옥의 왕국

 

잊히는 것이 두려워 불꽃 아래 모여 드는 밤
아무 것도 없음이 두려워 서서 있는 밤
오늘이 아니기를 바라며 자신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밤
제부도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둠 위로 부딪치는 날개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해변을 거닐고 사람들은 횟집 의자에 앉아
조개를 구워 먹으며 아무 손이나 붙잡고 있었다

아름다운 나라는 이곳에 오랫동안 왕국을 세울 것이다

폭죽처럼 얼굴에 비친 웃음은 목적지가 분명한 버스처럼
환한 등 사이로 사람들을 뱉어내고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버스가 감옥인 양 바다를 향해 파! 하니 타 오른다
그때 이미 감옥이 되어 횟집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는
꺾인 고개를 제치며 남자들의 거처에 스며들어
조개처럼 벌어져 있고 그 틈에 끼어들 준비를 하고 있는
손가락들은 감옥에 갇힌 채 빛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왕국의 잎사귀는 사람들의 몸을 덮어
폭죽 따위가 주는 웃음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지 않아
사람들 살 속에 파고들어 어둠의 종족임을 분명히 한 뒤
서둘러 새벽을 불러 사람들을 햇살의 그물에 가둔다  

 

그때 우리는 네거리에 있었다

 

우리들은 의심 많은 거리에서
바람이 어느 쪽으로 부는가를 가늠하고 있었다
공중에 떠 있는 달
하얀 시간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뿜는 눈빛이 두려워
기억을 더듬는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
근본을 속이지 못하는 가을이 기억에 단풍을 들일 때에도
우리는 네거리에 있었다

잘가라고 의심 많은 시간을 얼러 잘가라고
바람 부는 쪽을 향해 불어터진 울음이 가고
자작나무 숲으로나 갔을까 그때 한번쯤은 눈빛을 불렀어야 했다
이토록 겨우 똑같은 말투에다 상상에 멀지 않은
발자국들 때문이라면 때때로 네거리에 서 있는
그림자를 불러 옷깃을 세워주었어도 좋았을 것을

그러나 어떠했는가
어두운 말에서 자란 머리카락이 길고 긴 계단과 부딪칠 때
여름은 주름에 섞여 발자국이 흐리고
여자들은 서둘러 화장을 지우며 늙은 잠 속으로 내려가고
한때 창녀였던 의심 많은 거리들은
몸을 바꿔 추억들을 씻는다
그때, 우리는, 네거리에, 있었다

 

폐허 속에 사는 것

 

독거미 빠르게 거미줄을 친다
노린재 종족의 눈알을 먹어 치운다
꽃뱀 꼿꼿이 대가리를 세운다
수직으로 붙어 있는 촌충들, 먼 곳으로 데려가
마지막이 분명한 침묵 끝나는 것들에게 말을 붙이는 기만
썩는 울음 속으로 파고드는 송충이
과거를 팔아 저무는 꿈으로 푸덕이는 나방

저것들이 모두 폐허 속에 사는 것이라고
말했지?

   대합실에 앉았다
   추운 바람을 만나
   떠밀려 가는 마음 하나

건물들을 떠받치고 있는
대지는 
얼마나 힘들 것인가?

마음을 떠받치고 있는
육체는 또 얼마나 힘들 것인가?


 

금방 잊히는 것들

 

저 아이, 뼈가 마를 대로 말라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살이라고는 뼈를 감싸는 정도여서
머리조차 핏줄이 보이는 저 눈빛
허기는 목으로 가기 위해 햇빛에 도져 있고
파리는 악착같이 입 주변을 맴돈다
아이를 안은 여배우는 가벼운 자기 삶에
울음을 바르고 나는 저녁밥에 배가 부른 채
비스듬히 화면을 본다
저 아이, 젖병을 물리자 토해낸다
오랫동안 먹지 않아 식도도 배도
눈물 언저리에서 맴돈다
여배우 가눌 수 없는 눈물로
아이를 안은 채 자신을 짓찧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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