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효근 자선시편 / 아름다운 청소년과 놀고 있는 시
복효근
1991년 계간 『시와시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버마재비 사랑』,『새에 대한 반성문』,『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목련꽃 브라자』,『마늘촛불』시선집으로 『어느 대나무의 고백』을 내었다.
편운문학상 신인상, 시와시학상 젊은시인상을 수상하였다.
토란잎에 궁그는 물방울 같이는
그걸 내 마음이라 부르면 안 되나.
토란잎이 간지럽다고 흔들어 대면
궁글궁글 투명한 리듬을 빚어내는 물방울의 둥근 표정
토란잎이 잠자면 그 배꼽 위에
하늘 빛깔로 함께 자고선
토란잎이 물방울을 털어 내기도 전에
먼저 알고 흔적 없어지는 그 자취를
그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면 안 되나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내가 꽃피는 일이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면
꽃은 피어 무엇하리
당신이 기쁨에 넘쳐
온 누리 햇살에 둘리어있을 때
나는 꽃피어 또 무엇하리
또한
내 그대를 사랑한다 함은
당신의 가슴 한복판에
찬란히 꽃피는 일이 아니라
눈두덩 찍어내며 그대 주저앉는
가을 산자락 후미진 곳에서
그저 수줍은 듯 잠시
그대 눈망울에 머무는 일
그렇게 나는
그대 슬픔의 산높이에서 핀다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겨울 숲
새들도 떠나고
그대가 한 그루
헐벗은 나무로 흔들리고 있을 때
나도 헐벗은 한 그루 나무로 그대 곁에 서겠다
아무도 이 눈보라 멈출 수 없고
나 또한 그대가 될 수 없어
대신 앓아줄 수 없는 지금
어쩌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눈보라를 그대와 나누어 맞는 일뿐
그러나 그것마저 그대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보라 그대로 하여
그대 쪽에서 불어오는 눈보라를 내가 견딘다
그리하여 언 땅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뿌리를 얽어쥐고 체온을 나누며
끝끝내 하늘을 우러러
새들을 기다리고 있을 때
보라 어느샌가
수많은 그대와 또 수많은 나를
사람들은 숲이라 부른다
어떤 나쁜 습관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거시기 슈퍼 아저씨와 엘리베이터를 타면 그는 자기 집 층수보다 한 층 위에서 내려 계단을 걸어 내려간다 이유를 물으니 자기 집 앞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리면 함께 탔던 모기들도 우르르 같이 내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기가 들리지 않을 만한 소리로 복선생도 그렇게 해보라는 충고를 준다 그 뒤로 나는 모기가 많은 날이면 부러 그 집 앞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려서 두 층이나 걸어 올라간다 참 나쁜 습관이다
안개꽃
꽃이라면
안개꽃이고 싶다.
장미의 한복판에
부서지는 햇빛이기보다는
그 아름다움을 거드는
안개이고 싶다
나로 하여
네가 아름다울 수 있다면
네 몫의 축복 뒤에서
나는 안개처럼 스러지는
다만 너의 배경이어도 좋다
마침내 너로 하여
나조차 향기로울 수 있다면
어쩌다 한 끈으로 묶여
시드는 목숨을 그렇게
너에게 조금은 빚지고 싶다
목련꽃 브라자
목련꽃 목련꽃
예쁘단대도
시방
우리 선혜 앞가슴에 벙그는
목련송이만할까
고 가시내
내 볼까봐 기겁을 해도
빨래줄에 널린 니 브라자 보면
내 다 알지
목련꽃 두 송이처럼이나
눈부신
하냥 눈부신
저...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
건기가 닥쳐오자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 떼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섰다
강에는 굶주린 악어 떼가
누우들이 물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누우 떼는 강을 다 건넌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
그 중 몇 마리는 저 쪽 강둑이 아닌
악어의 아가리 쪽으로 발을 옮길 지도 모른다
개장수가 다녀가다
개 팔어요, 개 삽니다.
큰 개, 작은 개 삽니다.
개 팔어요, 개~애 하면서 개장수 차가 지나간다
개장수는 차 속도를 줄이더니
가만히 서 있는 나를 위아래로 한참이나 훑어보고 간다
쟁반탑
탑이 춤추듯 걸어가네
5층탑이네
좁은 시장 골목을
배달 나가는 김씨 아줌마 머리에 얹혀
쟁반이 탑을 이루었네
아슬아슬 무너질 듯
양은 쟁반 옥개석 아래
사리합 같은 스텐 그릇엔 하얀 밥알이 사리로 담겨서
저 아니 석가탑이겠는가
다보탑이겠는가
한 층씩 헐어서 밥을 먹으면
밥먹은 시장 사람들 부처만 같아서
싸는 똥도 향그런
탑만 같겠네
어느 대나무의 고백
늘 푸르다는 것 하나로
내게서 대쪽같은 선비의 풍모를 읽고 가지만
내 몸 가득 칸칸이 들어찬 어둠 속에
터질 듯한 공허와 회의를 아는가
고백컨대
나는 참새 한 마리의 무게로도 휘청댄다
흰 눈 속에서도 하늘 찌르는 기개를 운운하지만
바람이라도 거세게 불라치면
허리뼈가 뻐개지도록 휜다 흔들린다
제 때에 이냥 베어져서
난세의 죽창이 되어 피 흘리거나
태평성대 향기로운 대피리가 되는,
정수리 깨치고 서늘하게 울려퍼지는 장군죽비
하다못해 세상의 종아리를 후려치는 회초리의 꿈마저
꿈마저 꾸지 않는 것은 아니나
흉흉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바람소리에
어둠 속에서 먼저 떨었던 것이다
아아, 고백하건대
그놈의 꿈들 때문에 서글픈 나는
생의 맨 끄트머리에나 있다고 하는 그 꽃을 위하여
시들지도 못하고 휘청, 흔들리며, 떨며 다만,
하늘 우러러 견디고 서 있는 것이다.
상수리나무 스승
학교 숲교실엔 몇 십 년 묵은
아름드리 상수리나무가 모여 산다
하나같이 허리께에 커다란 웅덩이 같은 상처가 있다
그 옛날 마을 사람들 떡메를 지고 와서
나무둥치를 쳐 울려 상수리를 땄기 때문이다
나무를 쳐댈 때마다
나무는 굵은 눈물 같은 상수리를 한 소쿠리씩
쏟아 냈을 것이다
벗겨진 제 상처를 안으로 오그리며
나무는 하늘로 더 멀리 가지를 뻗었을 것인데
그 가지 끝에 새들이 둥지를 틀었다
썩어가는 둥치 속으론
버섯이 자라고
청개구리가 기어들고
또 풍뎅이가 알을 깐다
내가 다가갈 때마다
나무는 무슨 이야기 같은 것 혹은 노래 같은 것을
이것들의 입으로 날갯짓으로 들려주곤 하는데
내 살아갈 길을 넌지시 들려주는 것도 같은데
한 계절도 아니고
한 해로도 끝나지 않아서
아예 이 숲에 살림을 차려서 모시고도 싶다
다친 새를 위하여
늦은 저녁 숲에
날개를 다쳐 돌아오는 새 있다
무리에서 저만치 처져서
어느 이역의 하늘을 떠돌다 오는지
꺼져가는 석양이 아쉬워
별 가까운 먼 하늘까지
갔다가 돌아오는지
절름거리는 날갯짓으로
별빛 한 가닥 물고 오는 새 있다
밤새 새는
부서진 깃을 다듬어
새로이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지
숲은
쓰린 달빛으로 수런거리던 것을…
숲에 가보라 새벽
새는 그새
해뜨는 쪽으로 높이 날아오르고
높이 나는 새의 날개깃엔
언제나 핏빛이 돌아
아침해 저리 고운 것을
보라 새가 떠난 자리엔
상처받은 자만이 부를 줄 아는
곱디 고운 노래가
숲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
나뭇잎 편지
누가 보낸 엽서인가
떨어져 내 앞에 놓인 나뭇잎,
어느 하늘 먼 나라의 소식
누구라도 읽으라고 봉인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손길이 펼쳐놓은 한 뼘 면적 위에
얼마나 깊은 사연이기에
그 변두리를 가늠할 수 없다
가장 소중한 것들은 이렇게
발음할 수 없다는 듯,
가장 깊은 사랑은
다만 침묵으로만 들려줄 수 있다는 듯
글자는 하나도 없어
보낸 이의 숨결처럼 실핏줄만 새겨져 있어
아무나 아무렇게나 읽을 수는 없겠다
누구의 경전인가
종이 한 장의 두께 속에서도
떫은 시간들은 발효되고 죄의 살들이 육탈하여
소멸조차 이렇게 향기로운가
소인 대신 신의 지문이 가득 찍힌 이 엽서는
보내온 그이를 찾아가는 지도인지도 모른다
언젠간 나도 이 모습으로 가야하겠다
춘향의 노래
지리산은
지리산으로 천년을 지리산이듯
도련님은 그렇게 하늘 높은 지리산입니다
섬진강은
또 천년을 가도 섬진강이듯
나는 땅 낮은 섬진강입니다
그러나 또 한껏 이렇지요
지리산이 제 살 속에 낸 길에
섬진강을 안고 흐르듯
나는 도련님 속에 흐르는 강입니다
섬진강이 깊어진 제 가슴에
지리산을 담아 거울처럼 비춰주듯
도련님은 내 안에 서있는 산입니다
땅이 땅이면서 하늘인 곳
하늘이 하늘이면서 땅인 자리에
엮어가는 꿈
그것이 사랑이라면
땅 낮은 섬진강 도련님과
하늘 높은 지리산 내가 엮는 꿈
너나들이 우리
사랑은 단 하루도 천 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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