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신경림 자선시편

주선화 2009. 11. 13. 13:20

신경림 자선시편 / 나의 인생 시의 길

신경림
1935년에 충북 충주에서 출생하였다. 동국대학교 영어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56년『문학예술』에 시 <낮달>, <갈대>, 등이 추천되면서 등단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시집 『농무』, 『새재』, 『길』, 『쓰러진 자의 꿈』, 등과 장시집 『남한강』, 등이 있으며, 평론집 『문학과 민중』,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 산문집 『바람의 풍경』, 『민요기행』, 『시인을 찾아서』등이 있다.

만해문학상(1974년), 한국문학작가상(1981년), 이산문학상(1990년), 단재문학상(1994년), 공초문학상(1998년), 대산문학상(1998년), 현대불교문학상(2001년), 4.19문화상(2001년), 은관문화훈장(2001년), 만해상(2002년), 스웨덴시카다상(2007년), 예술부문 호암상(2009년) 등을 수상하였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동국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갈 대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罷 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수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눈 길

아편을 사러 밤길을 걷는다
진눈깨비 치는 백리 산길
낮이면 주막 뒷방에 숨어 잠을 자다
지치면 아낙을 불러 육백을 친다
억울하고 어리석게 죽은
빛바랜 주인의 사진 아래서
음탕한 농지거리로 아낙을 웃기면
바람은 뒷산 나뭇가지에 와 엉겨
굶어 죽은 소년들의 원귀처럼 우는데
이제 남은 것은 힘없는 두 주먹뿐
수제비국 한 사발로 배를 채울 때
아낙은 신세타령을 늘어놓고
우리는 미친놈처럼 자꾸 웃음이 나온다

 

목계장터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목계장터: 남한강변 특수한 강장이 서는 나루. 박가분: 분의 일종. 상표 이름. 석삼년: 석도 3의 뜻. 중복으로 더 오랜 세월을 뜻함.

 

가난한 사랑 노래
--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여름날
-- 마천에서

버스에 앉아 조는 사이
소나기 한 줄기 지났나보다
차가 갑자기 분 물이 무서워
머뭇거리는 동구 앞
허연 허벅지를 내놓은 젊은 아낙
첨병대며 물을 건너고
산뜻하게 머리를 감은 버드나무가
비릿한 살냄새를 풍기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 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곳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히게도 한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파 도

어떤 것은 내 몸에 얼룩을 남기고
어떤 것은 손발에 흠집을 남긴다
가슴팍에 단단한 응어리를 남기고
등줄기에 푸른 상채기를 남긴다
어떤 것은 꿈과 그리움으로 남는다
아쉬움으로 남고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고통으로 남고 미움으로 남는다
그러다 모두 하얀 파도가 되어 간다
바람에 몰려 개펄에 내팽개쳐지고
배다리에서는 육지 매달리기도 하다가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수평선 너머
그 먼 곳으로 아득히 먼 곳으로
모두가 하얀 파도가 되어 간다

 

묵 뫼

여든까지 살다 죽은 팔자 험한 요령잡이가 묻혀 있다
북도가 고향인 어린 인민군 간호군관이 누워 있고
다리 하나를 잃은 소년병이 누워 있다
등 너머 장터에 물거리를 대던 나무꾼이 묻혀 있고 그의
말 더듬던 처를 꼬여 새벽차를 탄 등짐장수가 묻혀 있다
청년단장이 묻혀 있고 그 손에 죽은 말강구가 묻혀 있다

생전에는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이들도 있다
부드득 이를 갈던 철천지원수였던 이들도 있다
지금은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뫼 위에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를 키우지만
철따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으면서
뜸부기 찌르래기 박새 후투새를 불러 모으고
함께 숲을 만들고 산을 만들고

세상을 만들면서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 묵뫼: 오래 묵은 무덤으로 돌보는 이가 없음. 물거리:낙엽을 땔감으로 쓸 때 부르는 이름. 말강구: 장마당에서 말이나 되로 곡식을 되어주는 역할을 하면서 장마당을 관리하는 사람, 말監考가 속화된 말.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밤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떠도는 자의 노래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특급열차를 타고 가다가

이렇게 서둘러 달려갈 일이 무언가
환한 봄 햇살 꽃그늘 속의 설렘도 보지 못하고
날아가듯 달려가 내가 할 일이 무언가
예순에 더 몇 해를 보아온 풍경과 말들
종착역에서도 그것들이 기다리겠지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산역에서 차를 버리자
그리고 걷자 발이 부르틀 때까지
복사꽃숲 나오면 들어가 낮잠도 자고
소매 잡는 이 있으면 하룻밤쯤 술로 지새면서

이르지 못한들 어떠랴 이르고자 한 곳에
풀씨들 날아가다 떨어져 몸을 묻은
산은 파랗고 강물은 저리 반짝이는데

 

낙 타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나의 신발이

늘 떠나면서 살았다,
집을 떠나고 마을을 떠나면서.
늘 잊으면서 살았다,
싸리꽃 하얀 언덕을 잊고
느티나무에 소복하던 별들을 잊으면서.
늘 찾으면서 살았다,
낯선 것에 신명을 내고
처음 보는 것에서 힘을 얻으면서,
진흙길 가시밭길 마구 밟으면서.

나의 신발은.

어느 때부턴가는
그리워하면서 살았다,
떠난 것을 그리워하고 잊은 것을 그리워하면서.
마침내 되찾아 나서면서 살았다,
두엄더미 퀴퀴한 냄새를 되찾아 나서면서
싸리문 흔들던 바람을 되찾아 나서면서.
그러는 사이 나의 신발은 너덜너덜 해지고
비바람과 흙먼지와 매연으로
누렇게 퇴색했지만.
나는 안다, 그것이
아직도 세상을 사는 물리를 터득하지 못했다는 것을.
퀴퀴하게 썩은 냄새 속에서.

이제 나한테서도 완전히 버려져
폐기물 처리장 한구석에 나뒹굴고 있을 나의 신발이.
다른 사람들한테서 버려진 신발짝들에 뒤섞여
나와 함께 나뒹굴고 있을 나의 신발이.

 

아, 막달라 마리아조차!

안된 얘기지만 나는 후련했다, 미국 남부를 카트리나가 휩쓸었을 때. 아프간에서 이라크에서 그만큼 했으니, 너희들도 당할 때도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생각해 보니 왜 하필 그들인가? 그 잘나고 힘센 사람들은 다 두고 제일 못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만 수만 수십만이 죽고 다치고 부서져야 했는가?

우리가 너무 오만 방자해서, 함부로 산을 뚫고 바다를 메우고 땅속의 것 땅위의 것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걷어다 쓰는 바람에, 자연이 노해서 보복을 시작했다는 말에도 나는 동감이다.
하지만 왜 하필 그들인가, 이 지구상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가장 순박하고 가장 욕심 없이 사는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인도 그리고 파키스탄을 골라 해일이 뒤덮거나 지진이 뒤흔들어 수십만 목숨을 빼앗고 병들이고 온 땅을 폐허로 만드는가?

저 높은 데서 그분은 항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신다는 것, 그 말도 나는 믿는다. 한데 그분 너무 높이 계셔서 멀리 계셔서, 아래서 일어나는 일을 세세히 보고 계시지 못하는 건 아닐까?
인간이라는 것, 마치 우리가 개미나 하루살이를 보듯 해서 그 속에 슬픔도 있고 기쁨도 있고 사랑도 하고 다투기도 한다는 것 다 모르고 계시는 건 아닐까, 혹시?

그분 아드님의 발에 향유를 뿌리고 눈물로 닦고 머리칼로 씻은 막달라 마리아조차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너무 높이 계셔서, 너무 멀리 계셔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빛만 보면서 저 APEC에서의 정상들의 화려한 말의 잔치만 보면서, 지상에서는 더는 꿈도 기쁨도 가질 수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젊은 농사꾼의 탄식 따위 아예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 막달라 마리아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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