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안개에게 길을 묻다

주선화 2009. 12. 28. 21:50

안개에게 길을 묻다 / 조은길

 

 

 

그때마다 벗은 발로 들판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얼굴 붉은 태양에게 목덜미를 질질 끌려 되돌아올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가출 물새들은 팅팅 불어난 호수의 젖가슴에 주둥이를 박고 꾸역꾸역 날개가 자란다 지난밤 안개에 여자가 빠져 죽었다 벗은 신발 속에 긴 유서처럼 온몸에 안개의 지문이 그어져 있던 여자 날이 흐리자 호수가 둑 쪽으로 바짝 다가앉는다 물새들이 투덜투덜 호수를 따라 자리를 옮긴다 저 새들에게 호수는 벗어나고 싶은 감옥인지도 모른다 날개는 수만 리 하늘 길을 회전해야 하는 지긋지긋한 형량 같은 것 어떻게 저 둑을 넘을까

 

 

 

          시집『노을이 흐르는 강』서정시학 2007

 

 

            ─시인의 말

 

 시는 생의 통증을 견디는

 몰핀 같은 것이었다

 나는 몰핀에 취해

 눈앞의 세상을 함부로 파헤치고

 함부로 연민하고 함부로 비난했다

 그걸 묶어놓고 보니

 미안하고 부끄럽다

 미안하지 않는 시

 부끄럽지 않는 시를 쓰고 싶다

 배추꽃에 앉은 배추흰나비처럼

 개구리밥풀에 앉은 청개구리처럼